같은 회상, 다른 용도
내가 회상에 잠길 때는 대개 뭔가 힘들 때이다. 현실이 싫어서 일종의 도피를 하는 셈이다. 과거의 추억과 기쁨을 느끼며 위안을 삼는 것. 때로는 거기에 깊이 빠져 현실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버리기도 한다. 일도 싫고 밥 먹는 것도 싫고 그대로 동해바다로 떠나고만 싶고.
언젠가부터 내가 회상에 잠기고자 할 때, 응 내가 지금 많이 힘든가 보구나 하고 자가 진단을 내릴 줄 알게 되었다. 그러면 내게 뭐가 문제인지 조심스레 살펴본다. 모두 남들과의 대면 관계 속에서 내가 뭔가를 보여주고 평가받거나 남들이 보여준 뭔가를 평가하는 것.
그럴 땐 컴퓨터를 켜고 한글 파일 하나를 만들어 소박하게 이름 짓고 맨 윗줄에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본다. 그러면서 무슨 재미난 이야기가 나올까 기대한다. 엉뚱한 생각이나 영감을 즐기는 나로서는 제일 재미있는 순간이다. 가끔의 조용한 대낮이나 대개는 어두운 밤 하얀 등불 아래 키보드와 화면, 거기서 타자하는 나.
브런치를 만나고 나서는 회상에 잠길 때가 거의 없다. 회상에 잠기더라도 취재를 목적으로 기억을 소환한다. 회상에만 빠져 머물다가, 이젠 그것을 딛고 현재로, 미래로 생각이 뻗어나간다. 쉽게 시작하고 쉽게 멈추고 언제든 꺼내어 퇴고하고 다시 저장하고 발행할까 망설이고. 브런치 글쓰기는 메모광의 메모지 같은 존재다.
물론 부작용도 좀 있다. 일단 잠을 많이 갉아먹는다. 많지도 않은 나의 잠을. 그제 화상 면접하다 모니터에 뜬 내 얼굴색이 옆의 교수님과 확연히 대조되어 많이 놀랐다. 마음은 밝은데 얼굴은 반쪽이 되었다. 글은 줄이고 잠은 늘려야 하는데 브런치 이후로 브런치를 먹는 날이 많아졌다. 오늘 아침은 제때 먹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