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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마리 Oct 28. 2021

최선을 다해서, 잊었노라

혹은 최선을 다했기에 잊었노라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 뭘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내가 할 수 있을 것보다 더 최선을 다해서 했다.


그래서 뒤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미련이 남지 않아서다.

아무것도 내 발길을 잡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후회되는 게 많다.

그래서 그것들이 모두 내 발길을 잡는다.

그래서 쉽게 뒤돌아설 수도 없게 된다.


최선을 다해서,

그래서,

잊었다.


혹은

최선을 다했기에

잊었다.


아마도

최선을 다했다는 것마저도

깨끗이 잊힐 것이다


오늘도

그렇게 잊히는 날이 되길

바란다.




대학원 시절 후배들과 많이 얘기했다. 고민도 들어주고 논문 쓰는 것도 도와주었다. 언젠가 내가 너무  주기만 하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논문의 문제 해결은 당사자가 해야 하는데 내가 .  아이디어가 남의 것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 찜찜하고 못마땅했다. 그래서 조금만 알려주기로 . 놀라운 일이 생겼다.


그렇게 했더니,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다. 내 논문을 쓸 때도. 지혜의 샘이 급격히 말라 갔다. 마구 퍼 낼 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이던 것이, 쓰는 데 인색해지니 그대로 말라 가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다시 마구 퍼 올려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잠시 주춤하더니 샘은 이내 예전의 모습과 활기를 되찾았다. 다행이었다.


교수가 되어 무수한 학생들과 면담을 한다. 많으면 한 학기에 열 명이 넘는 학생의 석사논문을 지도하기도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이야기 나눌 때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가 한 얘기를 깨끗이 잊는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꼭 면담 일지를 쓰게 한다. 그걸 봐야만 내가 한 조언들이 기억난다.


헤어지고 나서 잘 잊는 사람이 있고, 잘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잘 잊는 사람은 최선을 다한 사람이다. 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주머니가 텅 비어서 잊을 수밖에 없다. 잘 잊지 못하는 사람은 아쉬워서, 미안해서 잘 잊지 못한다. 아직 줄 게 주머니에 가득해서 차마 잊질 못하는 것이다.


오늘도 깨끗이 잊히는 날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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