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실마리 Oct 31. 2021

두 가지 바탕

역사와 철학

학부와 대학원 석사, 박사는 모두 국어국문학과를 나왔지만, 이웃 학과에 관심이 많았다. 언어학과와 영문과. 국어학을 전공하고자 하였으니 국문과에 간 것이고, 국어학을 제대로 하려면 언어학을 잘 알아야 했기에 언어학과에 관심을 가진 것이며, 언어학의 주요 이론이 영어학에서 왔으니 영문과를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에 들어가 첫 학기 갓 부임하신 풋풋한 언어학과 교수님 수업이 인상적이었다. 언어학의 철학적 기초라는 제목의 강의였다. 모교 출신에 프랑스에서 박사를, 미국 MIT에서 박사 후 연수를 하셨다. 수강생들을 과대평가하시는 바람에 수많은 원서와 씨름해야 했다. 그때 중요한 것을 배웠다. 학문의 철학과 역사.


유럽에서는 학문의 시작을 그것의 철학과 역사로부터 한다고 하셨다. 언어학에도 철학과 역사가 있다는 것을 그때 분명히 알게 되었다. 대부분은 이해를 하지 못해 외우는 것으로 대신했지만, 촘스키의 언어학사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외국 논문을 읽고 좀 충격에 빠졌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그를 마음속으로 변호했다.


대학원 시절, 국문과 강의는 뒷전이고 언어학과와 영문과 수업이 주였다. 석사 두 번째 학기부터 들었던 영문과 수업은 나의 학문적 기초가 되었다. 대부분 미국 박사인 교수님들은 강의와 논문 쓰기, 교사의 역할에 대한 전형이었다. 박사 후 연수 때 내가 겪은 외국 현지 교수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실력을 보여주셨다.


영문과 수업도 흥미로웠지만, 언어학과에는 정말 MIT에서 촘스키에게 수업을 듣고 박사 심사도 받으신 당시 국내에 몇 안 되는 분도 계셨다. 나는 촘스키의 제자의 제자인 셈이다. 무슨 소문을 들으셨는지 그분은 나를 매주 화요일 개인 세미나에 멤버로 인정하시고 참석시키셨다. 젊음의 혈기에 기름을 부은 셈이다.


매주 화요일 교수님의 연구실엔 나를 포함해 두세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언어학에서 철학으로, 문학에서 영화로, 과학에서 신학으로 끝없는 사색의 모험을 떠났다. 끝나고 나서는 꼭 통닭집에서 생맥주를 사 주셨다. 토론은 이어지고 늘 아쉬움으로 끝을 맺는 게 5년이 넘었다. 정말 많은 것을 배웠던 시절이다.


교수님은 늘 당신이 촘스키를 연구하는 건 촘스키를 넘어서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감히 촘스키를. 교수님이 아무리 위대해 보여도 늘 촘스키보단 아래였다. 그러나 그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호기롭게만 볼 수 없는 그 선언을.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이지만 그래서 원조에게 직접 배워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촘스키 언어학은 두 가지 맹점을 가진다. 첫째, 언어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둘째, 언어의 시작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두 가지 한계를 아는 사람도 드물고, 안다 해도 인정하는 사람이 드물고, 인정한다 해도 굳이 염두에 두지 않으려는 사람이 대다수다. 나와 상관없는 문제라 치부하며 맹목적으로 촘스키를 따른다. 세계적으로.


놀라운 일이다. 더 놀라운 일은 촘스키가 언어학사에 대해 어둡고 그래서 훔볼트의 중요 개념을 왜곡하여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2015년 연구년 때 그 사실을 몸소 확인했다. 더욱 놀라운 건 그의 철학이었다. 촘스키 언어학은 데카르트에 기반한다. 그의 언어학은 수리언어학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은 수리철학으로 불린다.


데카르트의 철학을 요약하면 한마디로 심신이원론이다. 마음과 몸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둘은 너무나 이질적이라는 것, 그래서 얼마든지 그 둘을 따로 다룰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이후로 그 둘은 정말 따로따로 연구되어 왔다는 것. 데카르트가 문을 연 근대철학 이후 벌어진 이 모든 것이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데카르트의 심심이원론이 제대로 성립하려면 마음과 몸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과 동시에 마음과 몸이 상호작용한다는 점도 함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데카르트는 마음과 몸이 상호작용한다는 걸 설명하지 못한다. 송과선을 얘기했지만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반쪽짜리였다.


그런데 이후의 모든 학문이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었고, 촘스키의 언어학이, 20세기를 평정한  언어학의 혁명이 바로 데카르트의 철학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안하지만, 정말 절망적이게도 촘스키의 언어학은 이것만 가지고서도 그냥 틀렸다. 잘못된 토대 위에 올린 사상누각인 셈이다.


이걸 나만, 아니 우리만 모르고 있었다. 2015년 연구년 때 접한 프랑스와 독일의 유럽 언어학에서는 더 이상 촘스키는 문젯거리도 아니었다. 나는 다 자라 다시 방황을 해야 했고, 무언가 바닥에 닿아야 했다. 처절한 몸부림이었고 다행히 어떤 바닥에 닿아 새롭게 언어학을, 언어철학을, 언어학사를 다시 쓰게 되었다.


언어학은 역사와 철학을 가진다. 학문은 역사와 철학을 지닌다. 모든 분야의 일엔 역사와 철학이 있다. 그 일의 철학과 역사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야 그 일을 전복할 수 있다. 그래야 그 일보다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 철학과 역사는 분야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용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