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실마리 Nov 19. 2021

정공법

하루라도  놓고 있으면 메일함이, 메일박스가 넘쳐 난다. 한두 통이었다가  , 스무 , 몇십 통으로 번지기 일쑤다. 두통이 오기 시작한다. 메일로 끝나지 않는 문제도 많다. 당장 사람을 만나야 하거나 만남을 주선해야 하거나 급하게 문서를 만들어 보내야 하거나 휴일에도 공무로 일보러 나가야 하는 수도 적지 않.


지금은 시국이 시국인지라 좀 덜해졌지만 아직도 토요일, 일요일에 나가 장시간 업무를 봐야 할 때가 있다. 얼마 전 우연히 성격 테스트를 해 보았더니 나는 밖에서도, 안에서도 스트레스를 받는 유형의 사람이라고 한다. 예민한 건 알았는데 남의 말도 듣기 싫어하고 나 스스로의 말도 듣기 싫어하는 진정한 반항아였다, 내가.


어쩐지 매사 모든 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아마 내 주위의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퍽이나 놀랄 수도 있을 것 같다.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정말요? 정말이다. 자는 것, 먹는 것, 화장실 가는 것, 일하는 것, 논문 쓰는 것, 책 읽는 것, 글 쓰는 것, 만나는 것, 쇼핑 가는 것, 운동하는 것, 심지어 그렇게 중요한 아이 보는 것도.


단 하나도 쉽지가 않다. 그럴 땐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데 또 그게 번거롭다. 그래서 그냥 눌러앉아 버티며 즐겁게 노는 게 아니라 빈둥거린다. 그러다 일이 쌓이고 찾는 전화가 쌓이고 결재할 서류가 쌓이고 장 봐야 할 목록이 쌓이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혈압이 쌓이고 걱정이 쌓이고 피로가 쌓인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다.


눈덩이처럼 쌓이는 이 모든 일을 어떻게 다 감당해야 하나? 마술이, 요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도깨비 방망이나 친절한 인공지능 비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내게 주어진 일은 에누리 없이 내가 다 해 내야 한다. 혹시나 하고 머리를 굴려 일을 넘겨 버리면 더 큰일이 되어 사람 잡으러 온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이리저리 아무리 피해도 어쩌면 그렇게 용케 찾아오는지. 특히 집안일은 집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해결하지 않고서는 어디 숨을 데도 없다. 집안일은 부부가 다 함께 하는 것이란 원칙을 어려서부터 세운 까닭에 거의 기절할 것 같은 순간이 와도 같이 하려 든다. 다 욕심이라고? 아니다. 사람의 도리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여러 방법을 다 써 보았다. 별의별 방법은 역시 다양한 가능성으로 그칠 뿐, 진정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가지. 이름하여 정공법. 일의 약한 곳, 약한 고리부터가 아니라 강한 곳, 강한 고리부터 직접 공략한다. 그렇게 하면 나머지는 오합지졸. 예상보다 쉽게 끝난다. 물론 연구가 필요하다. 공짜는 없다.


언젠가 하버드를 졸업한 국내 교수가 방송에서 하는 말을 들었다. 한 주의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몇 권의 책과 수십 편의 논문을 읽고 그것도 모자라 동아리나 봉사활동도 해야 하는 하버드생들은 그 많은 일들을 다 해 내기 위해 열흘 전 끝내기라는 비법을 쓴다고. 마감 열흘 전에 벌써 일을 다 끝내 버린다는 것이다.


그걸 들은 게 그리 오래 전은 아니다. 당장 닥친 일도 그때그때 하기 힘든데 어떻게 알고 열흘 전에 벌써 일을 끝낸다는 걸까?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반복되거나 예상되는 일이 있다. 약간 일찍 해 놓으면 꼭 우렁각시가 와서 해 주고 간 것처럼 정말 고맙다. 일정보다 선수를 쳐서 일찍 끝내 버리는 것이다. 스스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정공법으로 처리하고 예상되는 일을 기한보다 일찍 마무리해 두니 어느 순간, 어라 왜 해야 할 일이 하나도 없지? 하는 때가 정말 왔다. 그 비법을 말한 교수는 한 번도 원고 기한을 넘긴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책도 잘 내고 방송 출연도 잦지만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라 연구하고 강의하고 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참으로 넉넉한 아빠가, 남편이, 지도교수가, 원장이 되어 만면에 웃음을 가득 채우고 사람들을 맞이한다. 피한다고 피할 수 없는 일이 다가오면 이젠 정공법으로 맞서려 한다. 어려운 문제가 닥쳐와도 정공법으로 미리미리 대처하면 의외로 쉽게 풀리는 일이 많았다. 사람 일은 사람 일이다.


누군가 내게 그렇게 정공법으로 다가오면 당연히 무섭다. 이 사람 뭔가 좀 아는데. 좋아. 그럼, 나도 정공법이다! 정공법으로 둘이 싸우면 볼 만하다. 학위논문 심사장에서, 논문 지도 현장에서, 열띤 업무 회의에서, 학술대회 토론장에서. 불꽃이 튄다. 아름답다. 자기 위치에서 물러서지 않고 정공법으로 맞선다. 진한 삶이다.


작가의 이전글 인류가 즐기는 일류의 흐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