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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마리 Dec 02. 2021

결함

defect

언어의 작동은 결함에 기인한다. 문장의 심층구조 혹은 기저구조가 만들어지고 난 뒤 그 구조가 지닌 애초부터의 결함을 메워 보기 위해 다양한 조치가 취해지는데 그것을 변형이라고 한다. 무엇이든 어떻게든 해도 좋으나 적법한 운용이 아닐 경우 원리들에 의해 걸러지게 된다. 문장의 심층구조에 그렇게 변형이 작용하고 그로 인해 문장의 표면구조가 얻어진다. 심층구조에 결함이 없으면 변형이 가해질 수도, 가해질 필요도 없다. 그 경우 문장의 심층구조는 곧장 문장의 표면구조가 된다. 그러나 심층구조를 만들기 위해 어휘부로부터 단어를 가져오는 것조차도 사실은 변형에 해당한다.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 자체가 거대한 결함이 되어 그것을 메우려 어휘부에서 통사부로 어휘 항목들이 도입되는 것이다.


물질의 세계에서 농도가 다른 두 액체가 만나면 농도가 짙은 액체가 농도가 옅은 액체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한 이동은 농도가 같아질 때까지 이루어진다. 그러한 움직임을 이끄는 것은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이다. 균질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균질해지게 되는 과정이 이루어지고 나면 열평형 상태에 이르고 그것은 곧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상태 즉, 열사망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우주의 마지막이다. 애초부터 농도가 다른 두 액체가 있어야 그런 움직임이 발생한다. 그것은 물질의 세계에서도 비균질의 결함 있는 상태로부터 움직임이 시작됨을 뜻한다.


태초에 원죄가 있었다. 거대한 결함이 있었다.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 지금까지도 여전히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고 있었을 것이다. 굳이 역사랄 것도 없이 무탈하게 그렇게 똑같이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죄가 있고 나서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고 수명은 줄어들고 노동과 출산의 고통이 심해졌다. 아담과 하와 이후의 사람들은 원죄로 인해 추방된 세계 속에서 고통 속에 살아간다. 원죄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부모의 짐이나 사회의 짐을 안고 삶을 시작한다. 애초부터 그렇게 결함을 가지고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완벽한 환경에서 완벽하게 태어나 완벽하게 사는 사람은 없다.


언어에서, 물질에서, 삶에서 결함은 애초부터 주어져 있는 것으로 그로 인해 언어가, 자연이, 삶이 작동하게 된다. 결함은 숙명처럼 언어와 자연과 삶의 출발점이 된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해도 이미 그렇게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지 모든 문장이, 물질이, 인생이 결함을 가지고 시작한다. 주어진 규칙이나 원리에 맞게 그러한 결함을 줄이려고, 최소화하려고 노력하는 게 언어와 자연과 삶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주어진 결함을 원망하고 탓하지만 말고 어떻게든 그걸 줄여서 아름다운 언어와 아름다운 자연과 아름다운 인생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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