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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마리 Feb 13. 2022

대학원에서 논문 쓰기

< 대학원 ABC, 면접 준비에서 졸업까지 >

< 대학원 ABC, 면접 준비에서 졸업까지 >

-현직 교수가 알려주는, 대학원 다니면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


4. 대학원에서 논문 쓰기

  4-1. 학위논문 쓰기

  4-2. 학술지 논문 쓰기




학술지 논문에서 학위논문까지


대학원에서 쓰는 논문은 크게  가지,  학위논문과 학술지 논문으로 나눌  있다.   학술적인 글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가지 측면에서 다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학술지 논문을 쓰다 보면 어느새 학위논문을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둘은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있다. 이는 특히 박사과정에서 더욱 그렇다. 석사과정에서는 석사논문 하나 쓰는 것만으로도 벅찬  사실이다. 보통 2 만에 석사논문을 쓰고 졸업을 하니 학술지 논문을  여유가 별로 없는 것이다. 수업을 3학기까지는 어느 정도  들어 두고, 마지막 학기에 전적으로 학위논문에만 몰두하는 식이다. 그러나 박사과정은 다르다. 수업을 3, 4학기 안에  듣고 나서도 한참이 걸려 박사논문을 쓰고 졸업하기 때문이다. 국어국문학 같은 인문학의 경우 대략 5년은 넘어야 졸업을 하게 된다. 따라서 학위논문 쓰기 전에 자연스럽게 학술지 논문을   이상 쓰게 된다. 본인이 쓰고 싶어서이기도 하고 때로는 학위논문 작성 요건으로서도 요구되기도 한다. 이렇듯 박사과정에서는 학술지 논문 쓰기가 매우 중요하며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인데 석사과정에서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먼저 학술지 논문으로 기본을 잡아 놓고  위에서 석사논문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도면밀한 기획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박사논문의 경우, 학술지 논문을 쓰다가 그것이 쌓이면서 어떤 경향성이나 흐름을 형성할  그것을 바탕으로 박사논문이라는  그림이 그려질  있는 것이다.


주제 정하기


학술지 논문이든 학위논문이든 먼저 주제를 잡는 게 중요하다. 무엇을 쓸 것인지 정해야 그다음 수순을 밟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대학원 면접 때 연구계획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연구 주제가 확실하고 유망하게 정해진 이를 뽑으면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고 그래서 교수와 학생 모두 수월하게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여하튼 연구 주제 선정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 막상 그것이 연구 현장에서는 쉽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는, 주제를 정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이미 좀 알고 있어야 하는데 연구 주제는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정하는 것이므로 결국 무엇을 잘 모를 때 연구 주제를 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역설에 가깝다. 이는 마치 인생에 대해 잘 모르는 시기에 자신의 꿈을 정하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려는 것과 같다. 세상에 어떠한 일과 직업이 있는지를 잘 알아야 본인이 어떤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잘 정할 수 있을 텐데 현실적으로 그러지 못한 어린 나이에 꿈이나 직업을 미리 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주제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순간 요구되는 마음 자세는 유연성이다. 내가 지금 정하는 주제가 반드시 끝까지 변함없이 유지되리라는 기대는 일찍부터 버리는 게 좋다. 쉽게 포기해서도 안 되지만, 무턱대고 고수하려 들기만 해서도 문제이다. 연구 과정에서 연구 주제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것은 당황스러운 일일 수는 있으나 창피한 일은 아니다. 처음에는 크게 잡았다가 작아질 수도 있고, 그와 반대로 시작은 작게 하였다가 점점 더 커질 수도 있다. 아니면, 처음과는 아예 다른 주제로 논문을 쓰게 될 수도 있다. 학술지 논문보다 학위논문에서 더 그렇다. 그 규모와 복잡성 때문이다. 학술지 논문이 30쪽 전후라면 학위논문은 100쪽 전후이다. 석사논문이 그렇다. 최근 나의 어떤 지도학생은 300쪽이 넘는 박사논문을 썼다. 물론 편집에 따라 절대적인 수치의 비교는 달라지겠지만 체감상 학위논문은 학술지 논문의 서너 배 정도가 된다. 박사논문은 석사논문의 서너 배가 된다.


이렇듯 연구 주제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는 처음에 어떻게 연구 주제를 잡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운 좋게도 예전부터 마음속에 간직해 온 주제가 있을 수 있다. 또 1학기 어느 수업에서 갑자기 어떤 주제가 마음에 확 날아들 수도 있다. 처음부터 매우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일 수도 있고, 처음에는 가물거리는 정도였지만 점차 구체화되어 하나의 연구 주제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구체적으로 자랄 수도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처음부터 줄곧 막막하기만 할 뿐 어떠한 영감도 힌트도 주어지지 않은 채 암중모색만 계속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정말 암담한 경우이다. 이때 떠오르는 한 가지 사례는 다음과 같다. 공부를 꽤 잘하는 선배였는데 개론서의 색인을 검색하다가 마음에 드는 용어를 가지고 석사논문 주제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듯 내 마음을 끄는 용어를 색인에서 몇 개 발견하고 그것을 책의 본문에서 일일이 찾아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으로 사례를 살피고 저울질해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발표들을 들어보는 것이다. 기획 발표에서는 그 분야 전문가가 연구사를 훑거나 최신 동향 및 연구 주제들을 소개해 주기도 한다. 또한 개인 주제 발표에서는 다양한 연구자들이 독특한 연구 주제를 들고 나와 해당 연구의 흐름과 본인만의 개성 넘치는 연구 주제를 뽐내기도 한다. 연구 주제는 누가 독점할 수 없는 것이어서 비록 몇 편의 논문이 나와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내가 관심만 있다면 그 주제에 뛰어들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동일한 연구 주제로 같은 시기에 여러 편의 학위논문이 통과되기도 한다. 주제가 같아도 결론은 제각기 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선행 연구 검토 및 문제 제기


본래부터 본인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거나 강의나 학술대회에서 접한 경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거나, 그렇게 연구 주제가 결정되고 나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본격적인 연구의 첫 단추는 선행 연구 검토이다. 즉, 연구 주제와 관련된 기존의 논의들을 찾아 읽는 것이다.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이해해야 하고 비판해야 하고 그래서 그 논문의 의의와 한계를 모두 짚어내야 한다. 대학원생이 좌절감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첫째, 읽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이 글이 한국어로 쓰인 것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정말 한 줄도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놀라운 순간이며 내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닌가 스스로 회의감에 깊이 빠지기 쉬운 순간이다. 둘째, 이해는 어떻게 되었는데 그 논문이 너무나 잘 쓰여 있어서 더 이상의 연구는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이미 이 사람이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끝장을 내었는데 나 같은 풋내기가 감히 무엇을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강한 회의감과 자괴감이 드는 것이다. 셋째, 이해도 되었고 문제점도 발견되었는데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대안 없는 비판에 그친 것을 논문이라 인정해 주지는 않는다. 문제 제기가 있으면 반드시 해결 방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연구 주제를 잡고 그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의 시작으로 선행 연구 검토를 이야기하였고 그와 관련하여 세 가지 장벽을 언급하였다. 첫째, 이해가 되지 않는다. 둘째, 문제점이 보이지 않는다. 셋째, 대안이 없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이해될 때까지 읽어야 한다. 읽고 또 읽으며 이해를 구해야 한다. 선배나 교수님께 질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르는 게 나올 때마다 물을 수는 없다. 또 논문이나 책 한 권을 다 물을 수가 없다. 결국에는 나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해당 문헌을 계속 읽으며 이해해 나가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해되는 부분부터, 그러한 부분에 의지하여 아는 부분을 점점 더 넓혀 나가야 한다. 반복해서 읽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자신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는 것을 여러 번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해가 되어 놀랄 것이다. 마치 도미노처럼 연이어 다른 부분들로 이해가 되기 시작할 때의 희열이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실감이 날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구나 하고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일구어 낸 글쓴이가 정말 위대해 보일 것이다.


이제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어야 한다. 비판적 검토이다. 선행 연구의 의의와 한계를 짚어내야 한다. 그 논문에서 의의만 발견될 뿐 한계가 보이지 않는다면, 끝끝내 보이지 않는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포기하기에는 늘 이르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사람이 완벽하지 않으니 그가 쓴 논문도 결코 완벽할 수가 없다. 나의 오랜 학문적 이력 속에서 이 생각은 언제나 옳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연구자는 매번의 연구에서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그 순간 학문의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 역시 박사과정 시절 어떤 논문 하나를 붙잡고 한 달 동안 읽으며 그 한계를 이끌어내고자 노력한 때가 있다. 국내의 대학자이고 도무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만 같은 철저한 논문이었는데 한 달이 거의 다 되어 가는 어느 시점에서 그 논문은 그만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아직도 그 순간이 기억에 생생하다. 대가들도 생각의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후학들은 대가들이 모르는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선배의 생각이 가진 한계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어렵지만 그만큼 짜릿하다.


해결 방안 제시


이제 세 번째 단계로 접어들 차례이다. 선행 연구들에서 문제점들을 찾아내었다면 이제 그 대안을 스스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문제점을  찾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논문이 되지 않는다. 논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문제 제기와 해결 방안. 학술적 글쓰기의 모든 경우에 이러한 공식은 통한다. 더 나아가 모든 글은 어떤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그 글에서 던지고 있는 문제와 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제목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글의 물음이다. 가령, 어떤 책의 이름이 '언어학개론'이라면 그 책은 '언어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인 것이다. 두 개의 단계를 거쳐 이제 해결 방안의 제시라는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 가장 창의성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리고 이 순간 또 한 번의 거대한 좌절감을 맞보게 된다. 아니, 대가들도 모를 것 같은 문제에 대해 감히 나 같은 하룻강아지가 뭘 안다고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말 이렇게 학문은 어렵다는 말인가? 물음이 클수록 그에 대한 답도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든 답은 이미 문제에 담겨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정공법이 필요하다.


거대한 대답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논문에서 연구 목적은 크게 잡지 말아야 한다. 비록 선행 연구 검토에서 여러 가지 문제와 한계를 발견했다고 해도 그중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밝히고 그것에 초점을 두어 논문을 전개하며 해결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문제들이 무엇인가를 다 알지만 나는 이것에 대해서만 대안을 제시해 보기로 한다고 분명하고 겸손하게 진술해야 한다. 결국은 그런 얘기인데 뭔가 큰 일을 해 내는 것처럼 떠벌려서는 곤란하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리고 분명히 나중에 본인 스스로가 후회하게 된다. 작은 문제이든 큰 문제이든 그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먼저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바로 문제 자체이다. 문제 자체에 힌트나 답이 숨어 있는 경우가 정말 많다. 정말 그게 안 보인다. 아마도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그럴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처음으로 돌아가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문제 자체를 바라보면 의뢰로 문제가 쉽게 풀리는 경험을 적지 않게 했다. 그리고 문제를 정면에서 응시하고 돌파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심정으로 이 길 저 길 다녀볼 수 있다면 결국에는 정공법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학술지 논문 쓰기


학술지 논문이든 학위논문이든 연구 주제를 잡고 선행 연구를 검토하며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것은 동일하다. 다만 그 규모에서 학술지 논문이 학위논문보다 작다는 차이는 있다. 학술지 논문을 투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학술지를 발행하는 학회에 회원 가입을 해야 한다. 요즘은 즉각 입회 허가를 해 주는 편이지만 때로는 오래 걸리거나 교수님들의 추천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해당 분야에서 권위를 가진 학술지일수록 더욱 까다롭다. 요즘처럼 정부에서 등재지니 등재 후보지니 하면서 학술지를 직접 평가하기 전에는 정말 학계에서 자연스럽게 권위를 가지게 된 학술지들이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학술지가 있듯이 국내에서도 분야마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학술지들이 있었다. 비록 요즘에서는 그런 권위가 많이 희석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전통을 지닌 학술지들이 전공마다 있다. 처음 논문을 투고할 때부터 이런 권위 있는 학술지에 투고할 필요가 있다. 처음 논문을 투고하니 떨어져도 당연하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 교수가 되어 가진 게 많아지면 잃는 것도 많다. 무엇보다 자존심이다. 학문에서 버려야 할 것 중에 으뜸이 자존심이다. 자존심 때문이 무엇을 받아들이는 것도, 무엇을 버리는 것도 쉽지 않다.


학술지 가입을 하고 학술지에서 정하는 투고 방식을 준수하여 서식에 맞게 작성하여 투고를 한다. 학문 분야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국어국문학 분야에서는 두 달 내외의 심사 기간을 거친 후 심사 결과가 통보된다. 게재가, 수정후 게재가, 수정후 재심사, 게재 불가. 아무런 수정 없이 곧장 게재가 가능하다는 게재가, 일부 주변적인 수정이 이루어지고 난 후 게재가 가능하다는 수정후 게재가, 근본적인 문제를 고친 후 다시 심사를 하여 게재 여부를 가려야 한다는 수정후 재심사, 논문을 전반적으로 다시 쓴 후에 다음 호에 투고하라는 게재 불가 혹은 논문 반려. 게재가는 극히 드물고 대개 수정후 개제를 받으면 잘한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당해 학술지에 게재가 된다. 그러나 수정후 재심사의 경우는 이번 학술지 게재가 어려울 수 있다. 게재 불가는 해당 학술지에 영영 싣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아니 어떤 다른 학술지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논문 심사에는 보통 3명의 익명의 심사자를 정하게 되는데, 이들은 대체로 투고 논문의 참고문헌에 등장하는 주요 연구자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논문의 내용이 바뀌고 그래서 참고문헌의 목록이 대폭 바뀌기 전에는 심사 위원도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탁월한 내용의 논문이라면 대개 게재가 판정을 받아 쉽게 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탁월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학술지에 무난히 실릴 수 있는 논문은 그것이 해당 분야에서 큰 문제없이 받아들여질 만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해당 분야의 틀을 깨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논문은 어떨까? 결코 게재가 쉽지 않을 것이다. 놀랍게도 학계는 그런 논문을 쉽게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기존의 논의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거나,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고 하거나, 아예 처음부터 뭔가 잘못된 논문이라고 하거나 하여 결국에는 게재 불가 판정을 내리기 쉽다. 토마스 쿤이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책에서 제안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것을 잘 설명해 볼 수 있다. 모든 학문의 분야마다 당대의 주류적인 시각, 즉 패러다임을 가지게 되는데, 그런 패러다임의 울타리 안에서 착실하고 안전하게 작성된 논문들은 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패러다임에 도전장을 던지거나 근본적인 문제를 아프게 지적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논문이라면 그것은 기존의 패러다임이 장악하고 있는 주류 학술지들에 실리기가 어렵다.


본인이 정말 획기적인 생각을 가진 논문을, 기존의 패러다임을 깨고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논문을 썼다면 그것은 영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20세기를 구조주의 시대로 물들인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 소쉬르는 자신의 혁명적인 제안을 오직 강의에서만 설파하였을 뿐 논문이나 책으로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수업을 들은 제자들이 그 아이디어들이 새롭고 아까워 그의 사후에 유고로 낸 책이 세상을 뒤바꾼 것이다. 그토록 학계는 보수적이다. 엄격한 검증이라는 미명 아래 그렇게 참신한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사장되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 가운데 그런 놀라운 생각을 가진 이가 있다면 결코 좌절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조언해 주고 싶다. 우선은 기존의 패러다임에 걸맞은 논문을 써라. 그리고 힘을 가졌을 때 세상에 그런 새로운 아이디어를 과감히 내놓아라.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내놓을 경우 곧장 꺾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석사 1학기 기말보고서에서 제안했다가 담당 교수님께 호되게 야단을 맞아 나 스스로 접어 버린 생각이, 20년 뒤에 언어학의 주류적 시각이 되어 버린 뼈 아픈 경험이 있다. 그때 어린 마음에 그 소중한 생각을 접어 버린 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깝다. 아직도 그때 제출한 기말보고서를 간직하고 있다.


학위논문 쓰기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학위논문은 학술지 논문보다 분량도 많고 깊이도 깊다. 그리고 학술지 논문이 바탕이 되어 학위논문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그리 쉽지는 않지만, 석사논문도 학술지 논문을 바탕으로 쓸 수 있다. 방법론 위주로 학술지 논문을 쓰고, 그런 방법론 위에 더 많은 자료를 넓고 깊이 다룬다면 가능하다. 물론 자기 표절에 걸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논문일지라도 그것을 학위논문에 선행 연구로 인용하며 진술해야 한다. 박사논문은 대개 석사논문을 서너 개 모아 놓은 정도이다. 폭도 넓을 뿐만 아니라 깊이도 매우 깊다. 서론과 결론을 제외한 나머지 본문들의 한 장 한 장이 석사논문 한 편에 맞먹는 수준이다. 그런 장과 장을 하나의 주제로 일관성 있게 작성해 나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러니 멋진 박사논문을 써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일관성을 지니는 박사논문을 작성하겠다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긴 글에서는 한 부분을 바꾸면 곧장 다른 부분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마치 퍼즐 맞추기처럼 한쪽을 잘 수정해 놓으면 다른 부분들이 계속 틀어지게 된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논문 전체에서 발견되는 비일관성이나 문제점들을 최대한 줄여 보고 그래도 남는 부분이 있으면 솔직하게 그것을 학위논문의 맨 끝의 결론 마무리 부분에 적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다른 이들이 저자는 그 문제를 모르고 있었다는 뼈 아픈 지적을 하지 않게 된다. 약점을 밝히지 않으면 약점이 되지만, 약점을 분명히 밝히는 순간 그것은 저자의 학문적 엄밀함과 엄격함이요 향후 과제의 제시가 된다.    


학술지 논문 쓸 때와 학위논문 쓸 때 분명히 달라야 하는 것이 있다. 학술지 논문에서는 멋을 부릴 수 있지만, 학위논문에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학술지 논문은 비교적 가볍고 단편적인 주제를 번뜩이는 재치로 경쾌하게 쓸 수 있지만, 학위논문은 유장하고 무거운 주제를 매우 신중하고 건조하게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교수를 뽑을 때 가장 기본적으로 보는 것이 지원자의 학위논문이다. 특히 박사논문은 해당 분야의 어떤 주제를 얼마나 깊이 있게 다루었는가를 본다. 많은 박사과정 학생들이 본인의 박사논문에 여러 가지 분야의 색깔을 입히려고 하는데 나는 절대 반대이다. 박사논문은 반드시 어떤 전공 분야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보통의 경우, 학과에서 교수를 뽑을 때에는 해당 전공 교수가 없어서 뽑는다. 그 말은 심사하는 교수들이 본인이 전공하지 않은 분야의 교수를 뽑게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비전공자들에게도 그 사람의 박사논문은 정말 그 분야의 박사논문이 맞다는 확신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박사논문의 주제와 제목이 분명하지 않고 선명하지 않으면 임용 심사를 하는 교수들에게 확신을 주기 힘들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주제들은 학술지 논문으로 쓰고 학위논문에서는 본인의 전공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고 분명히 드러낼 수 있는 주제로 써야 한다.


마무리


예술 작품은 그것만의 고유함과 독창성을 생명으로 한다. 논문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학술지 논문이든 학위논문이든 그것은 세상에 없던 생각을 그 안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새로운 생각을 잘 길러 그것을 글에 담아 객관적인 심사 과정을 거쳐 그 독창성과 객관적 타당성을 인정받아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 바로 논문이다. 따라서 논문 한 편을 쓴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개념일 수도 있고, 새로운 세계일 수도 있다. 전에 없던 것이 나의 논문에서 새롭게 피어나 학계로, 세상으로 비상하는 것이다. 그것이 순수한 학문의 영역을 넘어서 세상으로 응용되어 일상의 삶을 촉촉이 적실 수도 있다. 결과를 생각하면 과정이 힘들어진다. 오로지 순수한 마음으로 본인이 흥미 있게 여긴 주제를 깊이 있게 천착하여 하나의 생명력을 가진 것으로 온전히 길러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논문은 작품이다. 내가 박사논문 심사를 받는 해에 어머니께서 설에 세배를 한 나에게 우리 아들, 작품 하나 멋지게 만들어 봐 하고 덕담을 해 주셨는데 그 말씀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아, 우리 어머니는 내 박사논문이 내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는구나. 내가 정말 그것을 작품으로 여기고 창작해 내는 것을 알고 계시는구나. 내 박사논문이 어떤 학회에서 총서로 지정되어 책으로 나왔을 때 어머니는 그 책을 소리 내어 읽으셨다. 아들이 썼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읽고 또 읽으셨다. 잠도 자지 않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면서도 하나의 작품을 빚어내리라는 것을 그렇게 미리 아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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