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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마리 Nov 07. 2023

이 시대의 시경! 성시경 말고!

첫 번째 음미

나는 노래를 들을 때 대체로 가사를 음미하지는 않는다. 

그냥 멜로디에만 집중한다. 

꽤 분석적인 성격인데, 노래를 들을 때조차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요새는 왠지 그동안 흘려들었던 노래들의 가사를 제대로 이해해 보고 싶어졌다. 


차를 운전하며 출퇴근하는 길이 얼마 전부터 매우 무료하게 여겨졌다.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도 해 보았는데, 그것도 밑천이 다 떨어져

재미있는 만담을 검색해 틀어 놓고 웃으며 운전을 했다. 

두 시간 전후의 왕복 운전 길이 꽤 유쾌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덧 바닥을 드러냈다. 들었던 내용이 다시 틀어지고 있었다. 


이젠 뭘 하지? 

그러다가 마침 계절도 가을이고 해서 이렇게 검색을 했다. 

8090 발라드. 

초등학교에서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까지, 내 학창 시절의 상당 부분을 보낸 시기. 

그때 문득문득 들었던 노래들이 다시금 여유롭게 들려왔다.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던 노래들도 새삼스럽게 반가웠다. 

그리고 이제는 가사에 관심이 갔다. 

멜로디 뒤에 숨어 있던 사연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 들었던 노래가 바로 다음 곡이다. 



술에 취한 니 목소리 

문득 생각났다던 그 말

슬픈 예감 가누면서 

네게로 달려갔던 날 그 밤

희미한 두 눈으로 

날 반기며 넌 말했지

헤어진 그를 위해선 

남아 있는 니 삶도 

버릴 수 있다고


며칠 사이 야윈 널 달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지막까지도 

하지 못한 말 

혼자서 되뇌였었지

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어

나를 봐 이렇게 

곁에 있어도 

널 갖진 못하잖아


<가질 수 없는 너> 강은경 작사, 뱅크 노래. 



나름대로 응축되어 있는 가사. 그 속에서 등장인물들을 구별하고

누가 무슨 얘기를 누구에게 어떻게 했는지 따져 보는 재미가 있다.


[술에 취한 니 목소리] 


니 목소리, 그런데 술에 취한 니 목소리. 

같이 술을 마시고 있다는 얘기인가? 

아니면, 전화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술에 절어 있다는 얘긴가?


[문득 생각났다던 그 말]


문득 생각나서 내게 전화를 걸었다? 

음... 역시 누군가 술에 취해서 나에게 전화를 건 거다. 

전화를 건 이유는 갑자기 내 생각이 나서! 


[슬픈 예감 가누면서, 네게로 달려갔던 날 그 밤]


왜 갑자기 슬픈 예감이? 그리고 그 밤에 곧장 달려가? 

술 취한 사람이 내게 전화를 하자, 뭔가 슬픈 예감을 가지고 냉큼 그에게로 달려가는 나? 

두 사람, 심상치 않아. 


보통 술 취해 전화 오면, 

너 술 많이 먹었다, 어서 끊고 자! 

이렇게 답을 하기 일쑤인데, 

나는 전화 받고 바로 네게 달려간다. 

정말 아끼는 모양이구나! 내가 너를!


[희미한 두 눈으로, 날 반기며 넌 말했지]


드디어 두 사람이 만났다. 

술 취한 너는, 눈썹 휘날리며 달려온 나를, 

게슴츠레한 두 눈으로, 힘없이, 그러나 매우 반가워하며. 


[헤어진 그를 위해선, 남아 있는 니 삶도, 버릴 수 있다고]


나를 부른 너는, 

그날, 

누군가와 헤어졌고, 

그래서 한 잔 찐하게 했고, 

갑자기 내 생각이 났고, 

그래서 나는 너에게로 달려갔는데, 

너는 그런 내게, 

“나 말이야, 그 사람 위해서 말이야, 죽을 수도 있어”라고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술 취해 부른 사람이, 

그날 누군가와 헤어졌고, 

그래도 잊지 못해서 그 사람 위해 삶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그렇게 나에게 말하고 있는 거다. 


[며칠 사이 야윈 널 달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별하느라 

마음과 몸이 많이 상한 너는

며칠 사이 눈에 띄게 야위어 버렸고, 

거기에 술까지 취한 너를 달래 놓고, 

나는 집으로 돌아온다. 


[마지막까지도, 하지 못한 말, 혼자서 되뇌였었지]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나는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왜 마지막까지 말하지 못했을까? 무슨 말이기에? 

아니, 다 떠나서 술 취한 사람에게 뭔 말을 해도 잘 알아들을 수나 있을까? 

아니면, 분위기가 그게 아닌 것 같아서 차마 말하지 못한 걸까? 


[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어]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

내가 너를 사랑하면서도 너를 내 사람으로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너 또한 네가 사랑하면서도 그를 네 사람으로 가질 수 없다는 것.


[나를 봐 이렇게, 곁에 있어도, 널 갖진 못하잖아]


나는 늘 너의 곁에 있었고, 

너는 그런 나 말고 정작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지. 

그런데 오늘 그 사람은 너를 떠나 버렸고, 

그런 너에게 나는 달려왔지.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도 너는 내 연인이 아닌 것처럼, 

너도 그를 사랑하는데도 그는 네 연인이 아닌 거야. 

나는 너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데, 너는 정작 그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고 있어. 


그런데 웬만큼 다 이해하겠는데, 

왜 앞에서 [슬픈 예감 가누면서]라고 했을까? 


내가 사랑하는 네가 실연의 슬픔을 혹시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예감? 

그게 슬퍼? 

너무 이타적인 것 같다. 

그게 아니면, 

내가 짝사랑하고 있던 네가 정작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될까 봐? 

그게 더 말이 되는 거 같다. 

설마 했는데 그랬던 거지. 


짝사랑하며 남자 사람 친구처럼 네게 대했던 나. 

그런 나 대신에 다른 남자를 사랑해 왔던 너. 

왠지 그럴 것만 같았는데 정말 그랬다는 걸 알게 된 나. 

술 취한 너를 달래 주고 그렇게 터덜거리며 집에 온 내가 

차마 네게 하지 못한 말. 

진정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 있어! 

그게 나와 너야. 

이젠 너도, 나와 같은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구나. 


중고등학교 시절이나 대학생 시절에 

시를 읽고 한 구절 한 구절 해석하며

깊이 음미해 보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시경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백성들이 부르던 민요. 

그걸 모아 만든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시집. 

공자가 그렇게 극찬하며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 


오늘의 우리에게 시경은 무엇일까?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의 가사 아닐까?

이 시대의 시경! 성시경 말고! 

앞으로 시간이 나면 틈틈이 이렇게 가사들을 음미해 보려고 한다. 

잡히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그렇게, 내 마음대로. 


이젠 앞의 노랫말을 드라마처럼 풀어놓을 차례다. 


여보세요. 음... 나야 나... 음...

여보세요? 누구... 누구세요? 혹시 너? 너 술 취했니?

응... 좀 마셨어. 근데. 갑자기 니 생각이 나더라고. 음...

거기 어디야?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 나 갈 게. 어디야?


갑자기 웬 술을 그렇게...

혹시 누구랑 헤어진 거 아닐까?

정말? 설마...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뛰어나가는 내 발걸음이 

무척이나 떨리며 슬퍼졌다. 


어... 여기야... 왔어? 

뭔 술을 이렇게 마셔. 그것도 혼자서. 

으흐흐. 고마워. 와 줄줄 알았어. 너는...

눈이라도 좀 뜨고 얘기해. 안 되겠다. 너 집에 가야겠어. 

근데 말야. 나 오늘 헤어졌다. 그 사람 훨훨 떠났어. 

뭐? 그 사람? 그 사람이 누군데? 

나 말이야, 그 사람 위해서 말이야, 죽을 수도 있어. 

... 안 되겠다. 너 집에 가자. 내가 바래다 줄 테니까 지금 가자. 

음... 너도 왔으니까 한 잔 더 해야지, 무슨... 어딜 가자고...

아니야, 안 돼. 얼른 집에 가자. 얼른 일어나. 


그리 멀지 않은 집에, 

곱게 취한 너를 바래다주면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었지. 

이젠 너도, 나와 같은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구나 하고 말이야. 

내가 너를 사랑해도 너는 내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네가 그를 사랑해도 그는 네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가질 수 없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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