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4
# 문과대 교수 회의실1
//김 교수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다른 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동감입니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사고와 동일하다고 봅니다. 어떤 언어 이론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저는 기본적으로 언어가 사고 작용을 좌우한다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언어라는 창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이 교수님의 말씀에 이어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해서 한국인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어는 어디까지나 외국어에 불과한 셈이죠. 영어를 모국어로 알고 자라난 세대가 과연 한국 문화의 전통을 올바로 이해하고 계승해 나갈 수 있을까요?
//언어와 사고의 관계나 문화의 전통, 계승 문제와 같은 다소 추상적이고 학문적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가 지적될 수 있습니다.
강 교수는 새로운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현실적으로, 영어를 국가 공식 언어로 채택할 경우 영어를 구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자 지식인층이 정보를 독점하고 지배 계급을 이루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영어 식자층이 그러한 권좌에 오르겠죠. 한국어와 영어를 병용한다고 해도 특별한 정보는 영어로만 적혀 유통될 수 있습니다. 정보는 곧 권력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 문맹자가 현격히 적습니다. 그러나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할 경우 문맹자가 단번에 기하급수적으로 늘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맞습니다. 전통의 계승과 창조라는 다소 추상적인 이야기보다 사실상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회사에서 기본적인 업무 파악 이외에도 영어를 잘 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입사나 진급에 있어서도 이미 막중한 압력으로 존재합니다. 과연 우리 국민 누구나가 모두 훌륭한 영어 구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외국, 특히 미국에서 유학하고 오신 교수님들께서 영어공용어화론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반대하시는 듯하군요.
문과대 학장은 흥미롭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영어공용어화론을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현 상태에서 이미 영어가 독점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미 현재에도 대학이나 기업, 사회에서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그들은 영어공용어화가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되어 국민 모두가 영어를 배우게 된다면, 오히려 영어에 관해서는 정보의 민주화가 이루어진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이야기군요.
교수들은 모두 쓴웃음을 지었다.
//미래는 참으로 불투명합니다. 영어를 공식 언어로 인정하게 되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불행한 사태가 벌어질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행복한 미래가 펼쳐질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그 누구도 쉽게 장담을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가정될 수 없는 것이니까요.
노교수가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눈을 감았다.
//선생님, 그러나 영어공용어화론의 문제는 미래가 아닌 현실의 문제입니다. 사태를 올바로 파악하고 뜻을 합쳐 목소리를 내는 것이 지금 우리 대학 교수들이 해야 할 몫이 아닌가요! 세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발을 내딛는 동시에 그 모습이 바뀌는 미로와 같은 것입니다.
갓 들어 온 젊은 교수가 잔뜩 긴장하며 말했다.
//여론은 그렇게 순수하지도 정열적이지도 않습니다. 민족 문화의 전통이니, 언어와 정신의 밀접한 관계이니 하는 추상적인 이야기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서 영어 수업을 전면적으로 실시한다고 했을 때 학부모들이 이를 얼마나 반겼습니까? 그들에겐 민족이나 정신의 문제보다도 사교육비 절감이 더욱 피부에 와 닿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학장이 짐짓 기침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말씀을 정리하면 결국, 민족의 정체성 문제에서나 경제적 차원에서의 불평등 문제에서나 영어공용어화론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급하고 냉혹합니다. 아까 뉴스 속보에서 보도된 것처럼 대선을 앞두고 보수당에서 영어를 한국어와 더불어 국가 공용어로 사용할 것을 공약으로 주창하고 나섰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논의가 탁상공론만으로 그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동안 쉬쉬하던 문제가 국가적 차원에서 불거져 나온 것입니다. 정치가들의 얕은 술수니 어쩌니 하는 논평은 집어치우고 이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모색해야 합니다. 영어공용어화론이 대세라면 아무리 그 문제가 심각하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과연 현실적인 대안은 없습니까?
좌중은 모두 침묵 속에 휩싸였다. 노교수의 파이프 빠는 소리와 한숨 쉬는 소리, 기침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이미 어두워진 창문 밖 풍경들은 하늘과 땅이 모두 하나가 된 듯이 칙칙한 어둠 속에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었다.
//대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침묵을 깨고 입은 연 것은 컴퓨터학과에 재직중인 임창준 교수였다.
//이미 진보당 쪽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저에게 문의를 해 온 바 있습니다. 사실 보수당의 전략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되어 온 것이었습니다. 오늘 공식적으로 당의 입장을 밝히기 전에 보수당 내부에서는 이미 당론을 확정한 뒤 적절한 타이밍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오늘 일은 제게는 별로 놀라운 만한 사건이 아니었죠.
좌중의 시선은 일제히 회의실 한 쪽에서 들려나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고 있었다.
//강윤명 교수와 저는 막역한 사이인데, 오늘 문과대 교수님들께서 이 문제에 관해 논의를 하신다고 해서 저도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대안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 대안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학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을 했다.
//기계번역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즉, 한국 사람이 영어를 배워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영어를 배워서 한국어로 통역해 주는 것입니다. 한국어를 영어로, 영어를 한국어로 자동 번역해 주는 기계가 있다면 우리가 굳이 영어를 배울 필요는 없겠죠.
//아, 한영ㆍ영한 기계번역을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런 기술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그럼 간략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