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3
# 카이저 호프1
//야, 이거 누구야! 김 박사 아닌가?
//박사는 무슨.
//아, 박사과정도 박사지, 촘스키의 대를 이를 야심찬 소장학자 아닌가?
//놀리지 말고, 나도 한 잔 시켜 줘.
//못 온다고 했잖아.
//무슨 이야기들 하고 있었어?
//몰라서 물어? 대선 이야기 아니고 무엇이겠어. 너도 오늘 스터디 있다고 하더니 바람 맞았구나. 강 교수님, 또 긴급 소집되셨나 보지?
//잘도 아는군.
//척 하면 삼천리지.
절친한 친구 다섯이 모였다. 국어학을 전공하는 정수, 문학을 즐기는 재석, 자연언어처리에 푹 빠져 있는 소연,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용재, 그리고 물리학자를 꿈꾸는 준호. 5인방은 지난 해 1학기 인지과학 협동과정에서 처음 만나 우정을 싹틔우게 되었다. 서로 다른 분야를 전공으로 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서로에게 많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이제는 격의 없이 만나 서로의 전공과 관심 분야, 시사 문제, 그리고 개인적인 고민들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소연이 축하해. 네가 속한 연구실에서 이번에도 계속해서 기계번역 프로젝트 지원금을 따냈다며?
//고마워. 그런데 너는 어떠니? 강 교수님하고 추진 중인 프로젝트 말이야.
//응, 또 물먹었지 뭐.
//이런!
//요즘 들어 한 두 번 겪는 것도 아닌데. 이젠 순수 언어학 연구는 지원비를 따내기 힘들어. 너도 잘 알잖아.
//과학 기술이 발달할수록 순수 학문이 중요시되어야 하는데.
//교과서에서나 나옴직한 얘기지. 자, 꿀꿀한 이야기 그만두고 나오기 전에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봐.
//응. 대선 이야기? 드디어 터지고야 말았어.
//뭐? 뭐 말이야?
//조금 전에 TV에서 속보로 나왔는데, 드디어 보수당에서 도박을 걸었어.
//도박?
//도박이지 않구서. 과거 대선 때 진보당이 행정 수도 이전 문제를 새로운 이슈로 들고 나와 막판 뒤집기에서 성공한 것 기억하지? 이번 보수당의 긴급 제안도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재석이는 마치 정치 평론가인 것처럼 떠들어댔다.
//혹시 영어를 공용어로 인정하는 법안을 추진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눈치 하나 빠르군.
//그래,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어.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뭘 그래.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잖아. 사실 누가 먼저 총을 뽑느냐의 차이였지.
//진보당 쪽은 어때?
//유보적인 입장이야. 깜짝 놀랐겠지. 일단 당의 공식적인 입장은 내일 아침에 밝히겠다고 하더라구. 모두들 상기된 얼굴들이었어.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려고 할까?
//사람들?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을까?
친구들은 잠시 침묵 속에 빠졌다. 팝송과 TV 광고음, 그리고 맥주 들이키는 소리만이 이따금 들릴 뿐이었다.
영어는 사실상 한국의 교육과 문화의 중요 부분이 되어 왔다. 1990년대 후반 들어 IMF라는 국가 위기 상황을 겪으면서 영어 교육을 통한 국가 경쟁력 강화 여론이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금세기 초반 한국의 행정 수도가 지방으로 이전되고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한 경기 지역이 경제 수도가 되면서 관계 기관에서는 영어를 이미 상용화하여 국어와 함께 공식 언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를 지역 거주민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대학에서 시행되던 전공 영어 강의가 초ㆍ중ㆍ고등학교로까지 파급되었다. 정부는 교육의 국제화와 사교육비 절감이라는 취지를 내세워 수업의 절반 이상을 영어로 진행하도록 교육법에 명시하고 이를 시행하였다. 교육 시장의 개방으로 한국에 미국의 유수한 대학의 분소가 설치되고 제주도와 인천, 부산, 강원도 등에 관광 특구가 들어서면서 영어 사용 지역이 늘어가고 있다. 해외 다국적 기업들이 속속 한국의 경제 특구로 입주하였고 한국은 세계 무역의 아시아 허브 국가로 그 위상을 높여 가고 있는 시점이다.
//앞으로 여론은 어떻게 흘러갈까? 누구 편에 손을 들어주겠느냐 말이야.
//오리무중이야. 감히 선뜻 누구도 나서서 이야기해 오지 못하던 금기가 드디어 깨어지고 만거야.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감히 영어를 한국어와 대등하게 공용어로 삼을 것을 제안하지는 못했어. 그러나 이젠 상황이 바뀌었어. 여론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아. 철저히 경제논리로 무장하고 있어.
//정말 절망적이군 그래.
//그렇다면 이젠 도박도 아니잖아.
//그래도 마지막 남은 희망이 있잖아. 진보당 말이야. 어차피 정책 대결에서 보수당과 동일하게 갈 수는 없잖아.
//그건 그래. 그러나 모두 경제나 복지 문제 등에 혈안이 되어 있는 지금, 내걸 수 있는 이슈는 사실상 제한되어 있어. 이러한 시점에서 영어공용어화 문제는 분명 관건일 수밖에 없지. 그리고 과거 일제 강점기 때 국권 회복 운동을 하였던 것처럼 지금도 국어 살리기 주장이 어느 정도 힘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민족의 정체성이 달린 문제니까.
//난 부정적이야.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수를 쳐다보았다.
//뭐야. 넌 누구보다도 팔 걷어 부치고 나서야 할 사람 아니야?
//그렇게 흥분하지 마. 영어공용어화 주장에 대해 민족주의나 자아정체성과 같은 추상적인 슬로건을 내세운다는 것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해.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해.
모두들 동그랗게 떴던 눈을 잠시 감았다.
//그래, 그 말이 맞아.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 말이야.
//그게 뭐지?
//그걸 생각해 보아야지.
//아마 진보당 측에서도 지금 그 점을 고심하고 있을 거야.
//진보당 쪽에서 오히려 선수를 쳤으면 어땠을까?
//너 그거 지금 말이라고 하니?
//아, 아니야, 농담이야.
//야, 야, 머리 터지겠다. 일단 한 잔 들고 나서 또 생각해 보자.
친구들은 이미 거품이 빠져 버린 맥주들을 벌컥벌컥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