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2
# 대학원 강의실1
//자, 오늘 이 시간을 마지막으로 이번 학기 한국어 문법론 강의는 막을 내립니다. 수업이 끝나는 마당에 그간 궁금했던 점이 있으면 격의 없이 토론해 봅시다.
강윤명 교수가 학생들의 시선들을 살피고 있자 몇몇 학생이 손을 들었다.
//응, 박성우. 이야기 해 보세요.
//예, 우선 선생님 한 학기 수업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요, 강의 내내 궁금했던 것은 도대체 한국어의 문법을 이야기한다면서 왜 보편문법이라는 이론 틀을 가지고 논의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어 문법 그 자체로는 논의가 성립하기 힘든가요?
//예, 좋은 질문입니다. 그럼 그 질문으로부터 얘기를 풀어갑시다. 음, 내가 강의 첫 시간부터 줄곧 말해 왔지만, 보편문법이란 일종의 바벨탑 신화를 꿈꾸는 것일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모든 언어의 기저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문법 틀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처음 태어나 내재되어 있는 언어능력, 즉 보편문법 원리를 가지고 그가 태어난 환경에 맞게 그 원리가 허용하는 매개변인을 고정시켜 구체적인 언어, 예컨대 한국어나 영어를 구사하게 된다는 것이 보편문법 이론의 골자라고 하겠죠. 이것은 인간의 유전자에 녹아 흐르는 인간만의 특징입니다. 과연 갓난아이가 무슨 재주로 태어난 지 만 4년 만에 모국어를 습득할 수 있을까요? 내재화된 언어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촘스키가 주장한 보편문법은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공통 언어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한국어를 개별적인 것으로만 연구하는 것과 그 출발점부터가 다릅니다. 물론 이러한 연구는 한국어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를 토대로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본 강의에서는 이러한 보편문법의 시각에서 한국어 문법의 특징들을 강의해 본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한국어 문법의 개별언어학적인 측면들을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점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대답이 되었나요?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럼 또 다른 질문을 해 볼까요? 예, 유혜수 학생. 이야기 해 봐요.
//음, 선생님은 국어에 관해 이론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가르쳐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응용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국어를 바라봤으면 해요. 사실상,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그 언어 이론이 어떻게 생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의문이구요. 차라리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문법을 고안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것은 곧바로 입증될 수도 있고 실생활에 바로 응용도 가능하겠구요.
//저도 질문 하나 있습니다.
미희가 잠자코 있다가 얼른 손을 들었다.
//예, 좋아요.
//저는 언어교육적인 관점에서 여쭙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론 언어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보편문법 이론을 통해서 과연 사람이 실제로 어떤 언어를 학습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가령 주어가 VP 내부에서 V의 지정어로 기저 생성되었다가 TP의 지정어로 이동하여 주격을 점검받게 된다는 등의 문법 지식이 구체적인 언어 학습에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음, 두 학생 역시 다 좋은 질문을 해 주었습니다. 먼저 유혜수 학생의 질문에 대해 살펴보죠. 유혜수 학생의 질문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과연 촘스키가 말하는 보편문법이 경험적으로 실증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 그리고 또 하나는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문법이론을 연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특히, 첫 번째 문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최근 인간의 언어만을 담당하는 유전자로 보이는 것들이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인지주의 언어학에서는 인간의 언어능력은 별개의 또 다른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일반적인 인지능력이 언어 구사를 위해 활용된 것이라고 하지만, 언어만을 위한 유전자가 본격적으로 계속 발견되고 논의된다면 그것은 곧 언어능력이 인간의 두뇌에 생물학적으로 내재하고 있다는 것의 증거가 됩니다. 물론 앞으로 시간이 더 흘러야 되겠지만 아직 어느 쪽으로도 속단할 때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언어 연구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물론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의 문법을 만드는 것 또한 매력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문법이론은 아까 유혜수가 말한 것처럼 컴퓨터로 곧바로 검증 가능하기도 하고 실생활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그러한 문법이 곧 인간의 뇌에 내재한 문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그러한 문법은 인간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문법을 표상해 낸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계에 알맞게 변형시킨 것입니다.
//선생님, 그렇지만 인간의 보편문법이라고 하는 것은 증명되기도 힘들고 사실상 유용하지도 않은 것 아닌지요? 좀 심하게 말하면 탁상공론에 그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까 미희가 말한 대로 언어교육에서 사용될 수도 없구요.
유혜수가 강 교수를 다시 압박했다. 강윤명 교수는 특유의 여유 있는 웃음을 지으며 계속하여 말을 이어 갔다.
//유혜수 학생이 좀 앞질러 가는군요. 헛헛. 그렇습니다. 보편문법은 그리 실생활에 유용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보편문법의 접근 방식이 무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학문은 기본적으로 순수한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항상 무엇이 실생활에 응용될 수 있어야만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추상적으로 보여도 그것이 일정한 진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인간의 언어능력 자체에 대한 규명이 바로 보편문법이 꿈꾸는 이상입니다. 에 또, 다음 문제로 넘어가 얘기하자면, ....
종강 시간이 짧을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보통 대학원 문과의 수업은 한번에 3시간 정도 진행되는데, 오늘 강의도 역시 2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선생님!
교탁에서 교재를 주섬주섬 챙겨 나가려는 강윤명 교수에게 정수가 다가갔다.
//선정 결과를 보셨는지요?
//아니, 못 보았는데. 어떤가, 결과가.
//저, 아쉽게도 선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또 순수 이론언어학 쪽은 ...
//응, 그럴 줄 알았어. 괜찮아. 원래 공부는 좀 궁색하게 해야 제 맛이 아니겠어? 일제 강점기 때 한글 학자들이 연구비 받아가면서 공부했나? 헛헛.
//...
강 교수는 역시 특유의 웃음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몰아냈다.
//아 참, 오늘 저녁 때 우리 스터디 있잖아. 또 문과대 교수 회의가 잡혀서 오늘도 좀 어렵겠는데. 이광진에게도 연락을 좀 해 줘. 미안해. 일찍 알려 주었으면 좋으련만. 나도 급하게 연락을 받아서 어쩔 수 없었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정수는 터벅거리는 발걸음으로 대학원 건물을 빠져 나왔다. 고색창연한 고딕양식의 석조 건물은 회색의 구름 낀 하늘 아래 묵묵히 서 있었다. 벌써 몇 번째인가 화요일 스터디는 펑크가 났다. 몇 주째 계속되는 문과대학 교수들의 회의는 대선이 다가올수록 급박하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