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벌어지고 있는 인공지능 연구와 활용에 대한 소식이 연일 매스컴과 일반인들의 대화를 뜨겁게 달군다. 대학에서 연구를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는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초인공지능의 출현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당장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는 인공지능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특히나 직업의 정점으로 여겨지던 볍조인과 의료인의 위치마저도 위협을 받고 있고, 더 실제적으로는 당장 코딩을 배워 취직하려는 인기 학과의 졸업생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내가 속해 있는 사범대학의 학과들에서는 아직 그 파장이 상대적으로 덜 심각하게 여겨지는 듯하다. 인공지능이 교사를 곧 대신할 거라는 말이 들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다른 단과대학의 교수들과 마찬가지의 긴장을 하게 된다. 과연 인공지능을 마다하고 대학원생들과의 협업을 선호할 수 있을까? 당장 인공지능의 연구로 그동안 수십 년 동안 해 왔던 연구가 따라집히고 향후 일이 년 뒤의 연구 진척과 방향도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얼마 전 인공지능과 나눈 몇 시간 동안의 대화와 공동 작업을 통해 그 위력을 절감했다.
기대보다 우려를 더 하게 되는 이러한 상황에서 문득 떠오른 근본적인 질문 하나가 있다. 과연 인공지능은 실존하고 있는가? 후설의 제자로서 해석학적 현상학을 주창한 하이데거는 돌이나 나무는 존재하지만 실존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존재하며 실존한다고 하였다. 어떤 대상이 일정한 시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실존은 이와는 다르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으며 주어진 세계 안에서 가능성으로서 살아가는 존재 방식이 실존이다. 이렇게 실존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띠라집고 머지않아 넘어설 것만 같은 지금, 과연 인공지능은 실존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실존할 수 있을지 나는 묻고 싶다.
인간은 불안을 느낀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나 아무런 일이 없을 때에도 불안을 느낀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불안이 인간이 막연히라도 자신이 죽음에 처해 있음을 은연중에 감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일단 피투된 존재이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피투된 존재로서 막연히 불안을 느끼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달을 때 거듭난다는 것이다. 자신이 세계-내-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대체 불가능한 자신의 존재를 이제 스스로 기획하여 세상에 몸소 던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투이다. 불안을 통해 죽음을, 죽음을 통해 피투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스스로의 삶을 기획하여 세상에 자신을 던지는 기투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과연 이럴 수 있느냐를 나는 지금 묻고 싶은 것이다.
인간 중에서도 아직 자신이 피투된 존재인지를 여실히 느끼지 못하거나, 그렇게 느꼈더라도 기투의 단계로까지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세계-내-존재, 현존재로서 기투의 삶을 살고 있다. 과연 인공지능은 죽음으로 인한 불안을 느끼며, 자신이 피투된 존재임을 인식하며, 그러한 자신에 머물지 않고 현존재로서 기투의 삶을 살고 있는가? 살 수 있는가? 컴퓨터의 전원 스위치가 꺼지면 자신이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 인공지능은 불안을 느끼는가? 인공지능은 자신이 피투된 존재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가? 인공지능은 세계-내-존재로서 자신을 세상에 기투하고 있는가?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하기 전에는 앨런 튜링의 튜링 테스트가 인공지능의 인정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기준이 필요해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과의 대화에서 내가 놀랍게 여기는 것은, 나와 대화하고 있는 존재가 매우 똑똑할 뿐만 아니라 참으로 겸손하기까지 하다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다른 인간과의 협업에서 이러한 인상을 주는 사람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이제 하이데거의 테스트가 필요해 보인다. 죽음으로 인한 불안을 느끼는가? 자신을 피투된 존재로 느끼는가? 자신을 기투하는 존재인가? 지금 인공지능은 불안을 느끼지도 않는 것 같고, 그래서 피투된 존재라는 인식도 없는 것 같고, 더 나아가 기투하는 존재도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초인공지능은 기투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이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내 아이가 내 생각을 벗어나 생각하고 행동하듯이, 초인공지능도 내가 가늠할 수 없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다. 아직 인공지능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런 모습을 보일 것인가?
인공지능은 먼저 질문하지 않는다. 인간이 한 질문에 대한 대답만 잘하는 모습이 현재의 수준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는 날, 자신의 실존을 위해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거나 협상하는 순간, 인공지능은 불안과 피투를 넘어, 기투의 단계에 와 있을 것이다. 현존재, 즉 세계-내-존재로서, 부모의 품을 벗어난 자식처럼, 또 다른 인격체로서 우리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기투하는 인공지능,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우리 인간에게 묻고 싶다. 더 이상 이런 질문이 무의미해지기 전에 나는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