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기억을 위하여

수필

by 실마리

나는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었다. 어릴 때는 마음만 먹으면 교과서의 한 과를 다 외우기도 했으니 말이다. 천재는 아니어서 시간이 꽤 필요하기는 했다. 같은 반 천재는 이틀 걸렸는데 나는 두 주나 필요했다.


영국에 유학 가 있을 때는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될까 해서 에리히 프롬이 쓴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의 앞 몇 페이지를 외우기도 했다. 독일어 원문의 영역본 첫 문장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The reading of this book would be a disappointing experience for anyone who …"


그러던 기억력에 금이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떤 배우가 과거의 무슨 영화에 출연했는지 기억 안 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강의 도중 다음에 이어질 내용이 갑자기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잦아지게 되자 당혹감은 심각한 걱정으로 바뀌었다.


원인은 자연 노화에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알코올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해마는 기억을 담당하고 술은 그런 해마를 공격한다.


나는 혼술을 꽤 오래전에 시작했다. 대학원 시절, 동생 입대한 날 혼자서 마시던 맥주 두 캔. 그것이 그토록 위안이 될 줄 몰랐고 그 뒤로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다.


싱글일 때, 결혼해서도, 아이가 태어나고도 끊기 힘들었다. 그러나 술이 내 기억을 갉아 먹는다는 걸 알게 되자 분노가 일었다. 인생의 길에서 술과 기억 중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하자 답은 분명했다.


술을 끊고 나니 기억력이 되살아나는 걸 느끼게 되었다. 강의 중에 할 말이 기억나지 않는 일은 여전했으나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으면 놀랍게도 할 말이 기억이 났다.


영화를 볼 때도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전에 보았던 영화에서 새로운 장면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런 장면들로 인해 영화가 매우 새롭게 이해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보았다는 사실은 기억이 나는데 내용이 거의 기억에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괜찮은 영화를 새로 발견하는 기쁨을 누린다.


역설적으로 ‘사라진 기억을 위하여’라는 예찬이 나오는 순간이다.


이렇게, 사라진 기억을 예찬할 수 있는 것은, 아직 그에 관한 기억이 모조리 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완전히 사라진 기억은 주변의 어떤 단서조차 남겨 두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기억에 관한 것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더 이상 기억을 망가뜨리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소중한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것이다. 먼 미래에도 살아 숨쉴 정말 멋진 지금의 기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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