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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마리 Sep 19. 2021

박제의 철학

말과 글

동물의 가죽을 곱게 벗기고 썩지 아니하도록 한 뒤에 솜이나 대팻밥 따위를 넣어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양으로 만듦. 또는 그렇게 만든 물건. 이는 ‘박제’에 대한 국어사전(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이다. 박제의 의도는, 동물을 그것 자체로 보존하거나 보전하려는 것이다.


동물의 박제는 동물을 다른 상징 기호가 아닌 바로 그것 자체로써 상징화 혹은 기호화하려는 시도의 결과이다. 즉, 이 경우 박제는 ‘사물’과 ‘기호’ 사이에 ‘같은’ 혹은 ‘닮음’의 극대화를 꾀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퍼스가 얘기한 기호의 3가지 종류인 도상, 지표, 상징 가운데 ‘도상’의 가장 극단적인 예로 보인다. 즉, 박제는 하나의 ‘기호’로서 그것이 가리키고자 하는 대상과의 유연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사람들은 박제를 무서워하기도 하고 잔인한 행위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동물을 끔찍이 사랑하여 죽어서도 그것과 함께 하고 싶어서 박제를 만들어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박제는 더 이상 무서운 대상도, 잔인한 행위도 아니다.


박제는 죽어 있는 생물이다. 사체를 가공하여 더 이상 썩지 않고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박제는 이렇듯 살아있는 생명체를 그 가공의 대상으로 삼는데 여기에는 사람을 포함한 동물과 식물이 모두 해당한다. 즉, 미라나 사슴 박제, 말린 꽃 등이 모두 박제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박제를 직접 만들거나 전문가에게 부탁하여 만들어 소장하고 그것을 보고 만지거나 하며 소중히 여기며 감상한다. 동물의 경우 대개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존중하거나 쓰다듬으며 말을 걸기도 한다.


생물이 아닌 것도 박제의 대상이 되는데 경우에 따라 손질이 필요하여 더러워진 부분이나 썩기 쉬운 부분을 자르거나 방부 처리해 보존하고 역시 감상하기를 즐긴다. 오래된 집이나 건물, 책이나 옷, 그 밖의 온갖 문화재 등이 그 예이다. 시간이 지나 기능하기를 멈춘, 때로는 여전히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기도 한 옛것들은 모두 무생물의 박제라 할 수 있다. 기능만 있을 뿐 애초부터 생명은 없었던 것들이 이제 보존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은 결과적으로 앞서 든 동물 박제와 하등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생물의 박제와 무생물의 박제를 보며 사람들은 그것이 살아있거나 제 기능을 발휘했을 때를 생각하며 그것을 감상하고 그리워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것이 썩지 않고 보존되기를 바란다.


언어 안에서 문자언어는, 휘발성이 강한 음성언어를 박제화한다. 문자는 음성과 닮아 있지만,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가죽이나 뼈, 근육처럼, 음성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문자로부터 음성을 어느 정도 재현해 낼 수 있다. 고대 문헌의 해독에서나 현대 문헌의 독해에서 모두 마찬가지인데 완벽한 음성언어의 재현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문자로 적힌 음성언어는 일종의 박제이다. 문자로 적힌 모든 텍스트는 공히 박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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