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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진 Jan 13. 2019

08. 시대정신에 응답했던 유연한 사상가, 공자

공자의 인(仁), "서로 사랑하라"

공자가 등장했던 시기는 이제 막 철기 사회로 진입하던 때입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생산량의 증가, 일대 혁신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생산량의 증가는 기존의 권력구조에 변화를 주게 됩니다. 


먼저 중국의 고대사에서 역사로 읽을 수 있는 최초의 나라 주나라의 종법 질서가 붕괴됩니다. 주나라의 천자를 위로하고, 그 아래 혈연관계인 제후들을 신하로 두는 것을 종법 질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철기 사회로 진입하면서 각 제후국들의 생산량이 높아지고, 그에 따라 군대와 재산을 비축하게 되면서 주나라의 천자를 명목상으로 두고, 실제 권력을 제후국들이 가지게 됩니다. 또한 높아진 생산량에 따라 많은 상인계급들이 부를 축척하고, 이에 따라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게 됩니다. 제후국들의 일어서고, 새로운 상인계급이 나서기 시작하자 위아래의 구분이 사라지고, 약육강식의 세상이 도래하게 됩니다. 


주나라까지는 하늘이 천자를 점지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점지해준 천자가 실력이 부족하고, 나라는 제후국으로 나뉘면서, 명목상으로 있는 천자는 하늘의 뜻을 떠나나듯 합니다. 이에 공자는 이런 부조화를 살피면서, 도와 덕의 이치를 정립했습니다. 그래서 공자에 이르러서는 일방적인 도의 개념을 덕의 개념으로 보완하였습니다. 즉 덕을 쌓으면 도에 통달할 수 있다는 사람의 능동적인 작용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런 능동적인 작용의 일환으로, 각 제후국들은 스스로 천자가 되기 위해 실력도 갖추어야 했지만, 덕도 잃지 않으려는 일정한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단, 춘추시대에 한해서, 전국시대에는 형식상 '덕' 조차도 없어짐.)


그러면 어떻게 도에 통달할 수 있는가? 덕을 어떻게 쌓아야 하는가? 공자는 인(仁)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은 어떻게 회복하는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미루어서 남이 원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인(仁)의 실천방법이다." 《논어》<옹야>


 인(仁)이라는 한자 또한 사람인(人)와 두이(二) 자입니다. 사람이 두 명 있는 모습입니다. 즉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말합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실천하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남에게 해주는 실천, 즉 사랑입니다. 서양의 그리스도교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문장과 일맥상통합니다. 철기 사회로 진입한 후, 생산력이 높아지고, 제국이 형성되는 시기, 전쟁이 끊이지 않던 그 시기에 시대정신은 동서양의 시공간을 초월해서 같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공자의 인(仁)은 제자백가 사상으로 발전해나갔습니다.

 

공자의 사상에 대해서 몇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정명사상'(君君, 臣臣, 父父, 子子)이 있습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어버이는 어버이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논어》<자로>


종법 질서가 무너지고, 제후가 천자를 넘보고, 소인이 군자를 넘보는 세상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바오펑산의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군주가 솔선수범하고 군주답게 처신하고 나서 신하에게 신하 다운 체세를 요구할 수 있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처신하고 나서 자식에게 자식 된 도리를 다하라." 즉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맞는데, 윗사람이 모범을 보여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저는 바오펑산의 해석이 더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자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입니다." 《논어》<이인>


자공이 공자에 대해 대답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충(忠)은 진실된 마음을 가리키고, 서(恕)는 배려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진실되게 사람을 대하고, 사람을 대할 때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지극한 사랑의 실천으로 읽힙니다. 


충(忠)과 서(恕)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공자는 충(忠)보다 서(恕)를 강조했습니다. 충(忠)은 '자신이 서고자 하면 다른 사람도 서게 하고, 자신이 통달하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도 통달하게 하라.'라는 문장에서 읽히듯이 이타적입니다. 따라서 충(忠)을 하려면, 그만큼의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서게도 하고, 통달하게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서(恕)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도, 그냥 배려하면 됩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忠)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자, 그러면 공자의 인(仁)의 사상은 완벽할까요? 아닙니다. 곧 비판을 받습니다. 노자가 등장해서 '무위'(無爲)로 공자의 '유위'(有爲)를 비판합니다. 유위(有爲)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인위적인 가치 선정을 말합니다. 공자가 인(仁)으로 가치를 세우자, 인(仁)이 아닌 것은 배제하게 되는 스스로의 오류에 빠집니다. 갈등을 초래하고, 배제를 불러오는 사상이라는 것이죠. 노자는 이념과 신념이 높을수록 경박해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즉, 그 신념에 자기 자신이 먹혀버린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신념의 주도권을 약화시키고, 자신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을 인위적인 가치가 아닌 나 자신, 즉 '무위'(無爲)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무위'(無爲)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 그를 통해 '무불위'(無不爲)에 도달하는 것으로 변화무쌍한 현실에 조응할 수 있어야 덕을 쌓을 수 있다고 제시합니다. 


중국의 사상사는 공자와 노자의 상호보완으로 완성되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공자는 노자에게 가서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총명하여 사리를 깊이 살필 줄 아는 데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기 때문이오. 언변이 뛰어나고 지식이 많은데도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남의 허물을 들추길 좋아하기 때문이오." 《사기》<공자세가>


노자가 가르침을 받고 나서 떠나는 공자에게 해준 말입니다. '유위'(有爲)가 가지는 위험성을 정확히 지적했다고 생각합니다.  즉, 공자는 상당히 유연한 사상가였습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것도 없고, 그래서 안되는 것도 없다." (無可無不可) 《논어》<미자>


공자와 노자 사후에, 공자의 제자로 맹자와 순자가 등장합니다. 맹자를 통해서 의(義)가 강조되고, 공자의 유학은 실천적으로 심오해집니다. 순자를 통해서 예(禮)가 강조되고, 교육을 통한 유학의 실천이 자리 잡게 됩니다. 


순자로부터 법가(한비)가 정립되고, 그 법가로부터 진나라는 모든 제후국을 평정하고 천하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2년 만에 법가의 가혹함에 일어난 민란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진나라는, 노장사상을 공부한 유방의 그룹들에 의해 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한나라를 세우는 노장사상가들, 그러나 한무제에 이르러 다시 '독존유술', 즉 유가로 대체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공자의 유가가 중국의 사상을 대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자가 없고, 법가가 없으면, 즉 제자백가가 상호보완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유가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관계에 대한 정신은 서양에서는 종교로 자리 잡게 되었지만, 동양에서는 사상, 철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차이는 후대의 사상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정신은 동서양 시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했고, 그 시대정신에 응답한 사상만이 후대에도 영향을 끼치는 '축'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요?


《논어》《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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