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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진 Jan 13. 2019

09. 시대정신을 실천한 진나라

정치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굳이 옛것을 따를 필요가 없다

동양에서 시대정신을 반영한 공자의 인(仁)의 사상이 있었다면, 정치경제학 측면에서 본다면 진나라를 언급해야 합니다. 진나라의  전국시대의 통일 과정과 통일 후의 정책은 우리가 살펴볼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간략히 말하자면, 철기 사회로 진입한  춘추전국시대는 높아진 생산력으로 제후국들이 천자를 앞지르고 강력해졌습니다. 천자는 명목상의 천자일 뿐, 천자의 땅을 나눠가진  제후국들이 더 많은 재산과 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천자에게 조공도 바치지 않아 천자가 주요 행사를 할  때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강력해진 제후국들의 넘치는 재산을 가만히 두지 않았겠죠. 바로 상인계급이  출현하여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크게 발휘합니다. 공자가《논어》에서 '소인'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의 한 부류가 바로 이 상인계급들입니다. 


높아진 생산력과 늘어난 부는 제후국들 사이의 교역과 교류가 활성화됨에 따라 더 큰 경제적 효용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장사라는 것이  싼값에 사서, 비싼 값에 이 내다 파는 것이 속성인데, 그만큼 교역이 중요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교역과 교류가 생겨나게 되면 '시장'이 형성되게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질서'입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데 힘과 권력이 있다면 폭리를 취하거나, 독과점을 한다거나, 사기를 친다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상인계급들은 '질서'가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진나라의 살벌한 법 집행, 《한비자》의 사상인 법가사상에 대한 오해가 여기서 생겨났습니다. 각설하고, 진나라는 확실히 다른 제후국들과 달리 강력한 '질서'를 확립한 나라였습니다. 진나라의 성공 케이스를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진나라는 인재들에게 열려있는 국가였습니다.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던 진나라는 다른 나라의 인재를 영입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했습니다. 흔히 다른 제후국들이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실력 있는 인재들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반면에 진나라는 귀족들을  억누르고, 인재를 영입해서 출신과 성분에 상관없이 등용했습니다. 진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던 핵심인재들은 모두 진나라 사람들이 아닙니다. 


상앙(법 개혁), 장의(연횡책), 범수(원교근공) 3명은 위나라 사람입니다. 이사(법가사상) 초나라 출신이고, 여불위(군현제도)는 조나라 출신의 대 상인이었습니다. 이들의 법 개혁, 연횡책, 원교근공 정책, 법가사상 정립, 군현제도 시행 등은 모두 진나라에서 최초로 시행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진나라는 춘추전국시대 지식들에게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희망의 땅이었습니다. 


진나라 법가사상을 정립하고, 권력을 왕에게 집중시켰습니다. 강력한 왕권으로 개혁을 실시하고, 반발하는 기득권들을 억누르면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법가사상에 대한 오해가 가혹한 법으로 백성들을 괴롭힌다는 것인데, 진나라가 통일할 당시《한비자》의 법가사상의 주요 타깃은 관리, 중간계급이었습니다.


"물이 불을 이길 수 있는 것과 같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나 가마솥을 그 중간에 두면, 물은 끓어올라 모두 위로 증발하지만 불은 솥 아래에서 기세 좋게 타올라 물이 불을 이길 능역을 상실하게 된다. 법률이 간사함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은 물이 불을 이길 수 있는 것보다 더 명백하다. 그러나 법률을 집행하는 벼슬아치가 물과 불을 갈라놓는 가마솥의 행동을 한다면, 법률은 단지 군주의 마음속에서만 분명할 뿐이고, 간사함을 제압할 힘을 상실할 것이다." 《한비자》<비내>
"나는 벼슬아치가 나라를 혼란스럽게 할지라도 착한 백성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백성들이 혼란을 일으키는데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벼슬아치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현명한 군주는 벼슬아치를 다스리지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다." 《한비자》<외저설>


백성이 타깃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관리들과 중간계급을 통제해야 권력이 누수되지 않고 강력한 힘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가 주요 화두였습니다. 진나라는 이를 통해 강력한 왕권으로 다른 제후국들과는 달리 변화하는 시대정신에 맞게 국가를 변모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춘추전국시대 지식들에게 진나라는 신선한 사상과 제도가 현실에서 구현되는 희망의 땅이었습니다.


천하에서 몰려든 인재들과, 인재들의 뜻이 실현되는 강력한 왕권의 조화는 진나라를 일약 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진나라는 여러 가지  정치제도와 더불어 변방의 불모지의 땅을 대규모로 개간하여, 부를 급격히 늘렸습니다. 그리고 변방에 실효적 지배권이 없던 이민족,  건융의 땅을 수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모두 수복했습니다. 그 과정에 진나라 군대는 전국시대 가장 강력한 군대가 되었습니다. 정치권력과 경제, 군사 모든 부분에서 준비가 끝난 진나라는 통일을 시도하게 됩니다. 


강력한 적수였던 제나라는 항복했고, 또 하나의  강력한 남쪽나라 초나라는 전쟁에서 패해 망했습니다. 진나라의 전국통일에 대해 다른 제후국들이 스스로 무너진 것이라 평가합니다. 제나라는 권력 다툼으로 이미 국력이 기울었고, 초나라 왕은 탐욕 때문에 장의의 외교술에 걸려들어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그렇게 통일을 진행한 진나라는 중요한 정책을 실시합니다. 첫째는 정치적 측면에서 군현제를 확립합니다. 군현제는 이전의 봉분제와 대립하는 제도입니다. 천자의 형제들에게 땅을 봉분해주는 봉건  제도에서 벗어나, 현대의 지방자치 개념인 군현제도를 확립해서 황제의 관리들이 군과 현에 나가서 통치 임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군사와 경제의 권력은 주지 않습니다. 이는 봉분되는 제후들이 후에 욕심 때문에 스스로 전쟁을 일으켜 천하를 어지럽히기 때문에  봉분을 없애서 그 화근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황제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는 효과도 있습니다. 통일 이전의 진나라에서 보듯이 강력한 왕권은 개혁 정책의 필요조건입니다. 


둘째는 경제적 측면에서 화폐, 도량, 거동궤 통일합니다. 천자가 유명무실해지고,  제후국들이 모두 난립해서 전쟁을 치르면서 중국 전역의 땅들의 화폐, 도량, 거동궤가 달랐습니다. 상인계급의 이해관계를 업고  강력해진 진나라 입장에서 화폐, 도량, 거동궤의 통일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것들이 통일되어야 상인들이 질서 있는 시장에서 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사상문화적 측면에서 문자 통일합니다. 마찬가지로 제후국들이 난립하면서, 사상,  문화를 표현하는 문자도 제멋대로였습니다. 황제가 중앙 집중적인 권력을 가지려면, 사상, 문화의 통일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황제가 명령을 내렸는데, 각 지방에서 다른 말로 알아들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또한 사상, 문화의 통일을 통해서 각 지식인들의 교류와 융합, 이를 통한 발전을 꾀하고자 한 것입니다. 


위의 3가지 측면에서의 개혁은 진나라가 망하고 세워진  한나라가 그대로 계승합니다. 왜일까요. 위의 정치, 경제, 문화적 측면에서의 개혁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조치였기 때문에 한나라가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단, 천하를 제패한 유방은 군현제와 봉분제를 반반씩 섞어서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수도 주변은 군현제, 지방은 봉분제 이런 식으로, 그러나 한무제 때에 이르러 군현제는 확립됩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대한 오해입니다. 분서는 민간의 책들을 대상으로 소각, 정리한 것입니다. 위에 사상, 문화적  측면의 통일에서 보듯이 유학을 비롯한 여러 경전들에 대한 해석이 너무 제각각이라 그것을 통일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민간에서  소유한 책을 대상으로 했고, 당연히 국가 차원에서 유가를 비롯한 고전들은 따로 보관했습니다. 공인된 것인지 아닌지가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갱유, 유학자들을 생매장했다는 것도 오해가 있습니다. 진시황이 불로장생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를 이용한 도사들이 일확천금을 위해 사기를 치고, 도망가자 그 도사 집단들을 잡아다 매장한 것입니다. 


물론 유학자들과 대립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분서갱유에서가 아닙니다. 바로 군현제였습니다. 귀족 출신들은 봉분 제도로 땅을 얻어야 부유해지기 때문에 군현제를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보수적인 유가는 고대시대의 봉분제를 옹호하면서 귀족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유가와 대립한 법가의 이미지는 있으나, 현대에 알려진 것처럼 무차별적인 탄압은 아니었습니다. 이렇듯 새로운 정책을 시도하는 것은 언제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면 더욱 그렇습니다. 진나라는 분명히 새로운 시대정신을 현실에 적용했던 상당히 개혁적이고, 당당한 나라였습니다. 


"행동을 주저하면 명성을 얻지 못하고, 일을 추진하면서 머뭇거리면 공을 이룰 수 없다. 백성들과 처음부터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으며, 오직 일이 이뤄진 연후에 함께 즐길 수 있다. 정치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굳이 옛것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사기》 <상군열전>


진나라 재상 상앙이 제시한 법 개혁책이 반대파들에게 비판받자 진나라 효공이 흔들렸습니다. 그때 상앙이 진 효공에게 했던 말입니다.



《사기》 《한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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