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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진 Jan 13. 2019

10. 시대정신에 호응하지 못하면

사상이 교조가 되면 폭력이 된다

진나라는 시대정신에 호응해서 변화했습니다. 그러나 변화하지 못할 때, 정체되고, 퇴보합니다. 변화하지 못하는 현상의 근본 문제를 저는 사상의 경직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즉 교조로 인해서 동의 가장 폭력적인  형태가 될 때, 나 아닌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그 어떤 '관계'도, '만남'도 이루어질 수 없게 됩니다. 관계를 통해서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서 변화할 수 있는데,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정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중국의 유가는 다른 사상(도가, 불가 등)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나가지만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즉, 도가나 불교는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종교적 함의를 담고 있는 반면, 유가는 '치국평천하', 즉 치세, 구체적인 관계와 실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가는 도가와 불가의 원리를 차용해서,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고자 시도합니다. 그것이 중국 송나라 시절에, 주희와 왕양명의 시도였습니다. 주희를 통해서 성리학이 정립되고, 왕양명을 통해서 양명학이 정립되었습니다. 이(理)와 기(氣)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우주원리를 설명하려 했습니다. 주희의 성리학은 성즉리(性卽理), 격물치지(格物致知) 등을 주장했습니다. 마음은 기(氣)이고, 마음이 갖춘 도덕성 등의 이치는 이(理), 즉, 이(理)가 사람의 본성에 해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객관 세계의 실재하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지식을 갖춰야 알 수 있다는 격물치지를 주장했습니다. 


이에 반면, 양명학은 성즉리(性卽理)에 대비되는 심즉리(心卽理), 즉 그 마음 자체가 이(理)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효도는 배우고 익혀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실천하다 보면 생기는 것으로 효심과 효행은 하나라는 주장의 지행합일(知行合一說)을 주장했습니다. 이렇듯 유가가 심오한 철학으로 변화를 거치던 중, 명나라가 망합니다. 명나라가 기울고, 변방의 만주족이 중국의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망국의 위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명나라가 망하고 나서, 중국의 고전 사상, 유가를 받드는 나라는 이제 조선밖에 없다는 의식, 즉 '소중화' 사상이 자리 잡게 됩니다. 중국의 유가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그들은 교조가 되어 다른 사상들을 배척하고, 성리학을 유일의 사상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성리학과 대비되어 발전하던 양명학도 조선에 들어왔으나, 이학 취급을 받고 공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조선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중국,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무시하며 청나라에 대한 모든 것을 배척하는 흐름이 일게 됩니다. 당시 청나라는 중국을 제패한 후,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하고, 서양의 선진 기술(과학, 천문학 등)을 도입하면서 나날이 발전해나가고 있었습니다. 대국을 배우지 않고, 배척하며 '소중화' 사상으로 무장하여 우리가 최고라는 인식은 사상의 교조로 발전하여 폭력성과 획일성을 부가시켰습니다. 사상적 진공상태, 상상의 공백 상태에서 그 어떤 비판도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학의》를 쓴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라 불리는 사람들은 서얼 출신입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청나라를 배우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서얼로 차별받으면서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습니다. 서얼이 아닌 사람들은 박제가와 같은 입장을 밝히지 않아도 관직의 녹을 먹으며 떵떵거리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얼은 출신만으로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출세할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변화는 변방에서부터 시작된다지요. 서얼 출신들로 이루어진 북학파가 형성되고,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려는 일련의 행동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다 정조대왕의 등극으로 서얼들은 대거 규장각에 채용되어 관직을 누리고, 북학에 대한 여러 공부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조대왕이 너무 일찍 죽음에 이르게 되자, 그 뒤에 권력을 잡은 정순왕후(정조의 할아버지, 영조의 마지막 부인)가 수렴청정하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 되었습니다. 정조대왕의 모든 개혁 정책을 전부 중단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외척 정치의 끝인 세도정치가 시작됩니다. 


정조대왕과 북학파들의 활약으로 조선은 다시 사상적 활력을 갖추는 것 같았으나, 정조대왕 사후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면서 조선은 더욱더 교조적인 사상적 공백 상태를 겪습니다. 청나라에서 서양의 선진문물을 수입하는 경로는 선교사들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북학파 계열들은 선교사들과의 접촉이 잦을 수밖에 없었고, 북학파를 비롯한 깨어있는 지식인들, 사상적 공백 상태에 균열을  일으키려던 지식인들은 다수 천주교로 몰려 사형당하거나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그중에 정약용도 포함됩니다. 


정조 사후 조선의 19세기는 세도정치와 사상적 공백 상태로 국정이 마비되게 이릅니다. 그래서 19세를 민란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민란을 통해서 모순을 해결하려 했던 거죠. 그렇게 1세기를 낭비하고, 20세기 초입에 조선은 망하고, 일제에 강점을 당합니다. 


메이지유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인 일본 지식인들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하면서 말이죠. 일제에 강점될 당시 분함과 억울함에 자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대응하지 못합니다. 아니, 사상적 공백 상태를 한 세기를 지내다 보니, 지식인도,  권력층도, 모두 무기력했고, 실력도 부족했습니다. 일제에 결정적 타격을 준 것은 강점 이후 1919년 백성들이었습니다. 당시  3.1 운동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읽던 지식인들이 낭독도 못하고 자수한 반면, 백성들은 6개월 동안 전국에서 만세운동을 벌였습니다. 무서워서 꽁무니 뺀 지식인들, 권력층과 달리 백성들은 끝까지 싸웠습니다. 


저는 이와 비슷한 상황을 유럽의 중세 암흑기에서도 봅니다. 기독교인들의 사상이 교조화되면서 극한의 폭력성을 띠게 됩니다. 그들은  마녀사냥을 하면서 다른 모든 생각, 철학들을 배척합니다. 기독교가 아닌 모든 것은 폭력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게 중세를 보낸  유럽은 스스로 암흑기라고 이름 붙이듯이 아무런 발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유럽인들이 십자군 전쟁에서 보여준 유대인과 이슬람에 대한  학살, 그것은 이슬람 문명에 대한 열등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 정도로 유치해지는 것이 사상이 교조가 될 때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하나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효율을 추구하고, 더 빨라야 하며,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데 익숙했던 신자유주의 시대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끝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연명해가고 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대체할 이데올로기가 등장하지 않아서 생명을 연장한 것이지 그 자체의 동력으로는 지금 우리 시대의 모순을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해결을 못할 뿐 아니라 답을 제시하지도 못합니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는 단계라도  생각합니다. 사상적 공백 상태, 그 끝에 있는 것이죠.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새로운 생각들에 대해서 공격적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다양성에 대한 수용능력을 더 키워나가야 합니다. 나 아니면 다 틀렸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서로 다른 것은 차이일 뿐, 그것이 차별이 되면 안 됩니다. 다르다고 해서 우열을 짓겠다는 것은, 그 기준을 만들겠다는 사람의 오만함일  뿐입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수용하면서 배려하는 정신이 더욱더 필요한 때입니다. 


원리 원칙 없는 이들을 소인이라 하며, 자신이 가진 원칙과 생각을 가지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이들을 현인이라 하며, 정해진 원칙과 기준이 있지만 정도에 어긋남이 없이 융통성을 발휘하는 이를 성인이라고 합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군자는 무조건 긍정하면서 행하는 것도 없고, 무조건 부정하면서 행하지 않는 것도 없다. 언제나 '의'(義)와 함께 할 뿐이다." 《논어》 <이인>


그렇게 '의'(義)를 찾아갈 때, 우리는 새로운 미래에 한걸음 더 진입할 수 있습니다.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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