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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진 Jan 13. 2019

22. 착한 사람, 헤피엔딩은 없다

그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착하게 살면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권선징악(勸善懲惡)으로 이루어진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입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착하게 살면 당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착하게 굴다가, 실패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신념의 크기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보입니다. 시련에도 버티고 내딛는 사람과 시련에 타협하고 신념을 버리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이때 신념을 버리는 사람들은 다시는 착하게 살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면 착하게 살지 말아야 할까요? 착한 사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첫째, 착한 사람은 보상받지 못합니다.

정의는 스스로 실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패할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죽음 이후에 보상받을 수 있다는 개념을 적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종교의 신앙으로 보지 않는 이상, 우리가 죽을 때까지 성공할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더 높습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하게 살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행위를 다함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어떤 평가를 받든, 이후에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철저히 자기 자신의 행위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행위 그 자체에서 만족을 얻어 가는 것입니다. 이후에 보상되는 명예와 권력 등이 아니라, 지금의 행위 하는 그 자체를


셋째, 이것은 도덕에 대한 공리주의적 접근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는 도덕은 그 자체로 얄팍해서 금방 바닥을 드러냅니다. "내가 이렇게 보상해줄 테니까"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고통이 와도 그냥 참습니다. 보통 우리가 돈을 벌 때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은 힘들어도, 한 달 뒤에 받을 월급을 생각하며, 그 월급으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묵묵히 일합니다. 즉 미래의 보상을 기대하면서 참는 겁니다. 그러나 다른 경우 자신이 하는 일이 즐거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 즐깁니다. 돈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이겠습니까? 그럼 여기서 묻겠습니다. 착하게 사는 것이 고통입니까? 아직 고통으로 느껴진다면 그건 착한 행위 자체로 스스로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수준입니다. 그런 수준으로는 작은 시련이 와도 내팽겨지게 됩니다. 안 하니만 못한 결과입니다.


넷째, 대가 없이 '도덕'하는 것, 그것이 마음에 따른 정신적 평온함을 줍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좋다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대가 없이 '도덕'할 수 있습니다. 불의 한 행동은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내가 양심에 어긋나는 도둑질, 혹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를 했을 때 우리는 마음이 불편, 불안해집니다. 그런 마음은 정신에 나쁜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칩니다. 그것은 다시 행동에도 영향을 끼쳐, 평정심을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평정심을 잃게 되면, 그만큼 경박함, 초조, 탐욕, 작은 이익을 다투는 경쟁심, 세속적인 걱정 등이 생깁니다. 이런 마음들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사람은 돈과 권력만 있으면 행복할까요? 그건 수단일 뿐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행복의 상태는 마음의 평정을 이루는 상태입니다. 즉, 돈과 권력이 평정심을 가지는 여러 수단들 중 하나일 뿐 그 자체가 행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오면, 대가 없이 '도덕'하는 것은 그 정신적 평온함을 가져 스스로 행복하기 위함입니다.


다섯째,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적응할 뿐입니다. 어리석어야 손해인 줄 알면서도 '도덕'을 지키고 한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착하게 살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공을 보장받지 못하고, 보상도 없는데,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면 바보 같은 모습입니다.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멍청한 짓일 겁니다. "왜 그렇게 살아? 착하게 살면 누가 밥 먹여줘?"라는 핀잔을 듣기 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밥만 먹고살지 않습니다. 밥도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일 뿐이지 밥이 목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행복하려고 사는 것 아닙니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은 대중들의 욕망을 표현할 뿐입니다. 그래야 드라마나 영화가 장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는 힘의 논리가 작용합니다. 철저한 힘의 논리, 약육강식의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핍박받다 보니, 권선징악에 대한 욕망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착하게 살겠습니까, 어리석게 살겠습니까. 어떤 보상이 없어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인(仁)을 실천하는, 착하게 산다는 것은 평생 짊어지고 가는 것입니다. 보답은 없습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말했습니다.

"선비는 뜻이 크고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仁)의 실현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어찌 무겁지 않겠는가. 죽은 뒤에나 그만둘 수 있으니 어찌 멀지 않겠는가." 《논어》<태백>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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