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광진 Jan 13. 2019

01. 역지사지의 가벼움

역지즉개연, 상대방입장에서 나를 다스리다

'역지사지'는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기', '상대방을 배려하기'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배려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캐릭터를 분석하게 되고, 그것이 나에게 고정관념으로 굳어져, 상대방의 진심을 왜곡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역지사지'가 유래된  <맹자>를 보면 그 뜻이 더 심오하고, 깊습니다. 단순히 입장 바꿔 생각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맹자(孟子)》의 ‘이루편(離婁編)’ 상(上)에 나오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와 후직, 안회는 모두 같은 길을 가는 사람으로 서로의 처지가 바뀌었더라도 모두 같게 행동했을 것"(禹稷顔回同道 … 禹稷顔子易地則皆然)


우와 후직은 중국 고대의 완벽한 왕입니다. 안회는 공자의 제자 중에 가장 으뜸이었던 성인입니다. 세 사람의 특징은 '덕'을 지녔다는 것이고, 세 사람의 차이는 자란 환경입니다. 그 환경에 따라 우와 후직은 훌륭한 왕이 되고, 안회는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공통의 '덕'을 지닌 사람이 환경이 바뀌면 그 환경에 적합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가난에 시달리는 안회가 처지가 어렵다고 '덕'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 임금은 천하에 물에 빠지는 이가 있으면 자기가 치수를 잘못해서 그가 물에 빠졌다고 생각했고, 후직은 천하에 굶주리는 자가 있으면 자기의 잘못으로 그가 굶주린다고 생각해서 이처럼 (백성 구제를) 급하게 여겼다."(禹思天下有溺者 由己溺之也 稷思天下有飢者 由己飢之也 是以如是其急也)


우와 후직은 다른 사람이 잘못되는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우는 물을 관리하는 '치수'를 했다고 높이 평가받는 왕이었고, 후직은 농사짓는 법을 알렸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는 왕이다. 그들은 수해를 입거나, 굶주리면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았습니다.


“남을 예우해도 답례가 없으면 자기의 공경하는 태도를 돌아보고, 남을 사랑해도 친해지지 않으면 자기의 인자함을 돌아보고, 남을 다스려도 다스려지지 않으면 자기의 지혜를 돌아보라."(禮人不答反基敬 愛人不親反基仁 治人不治反基智)


남이 나에게 예의 없이 행동하거나, 불친절하게 대하거나, 잘 다스려지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 그 대상을 탓합니다. 예의가 없다거나, 사회성이 부족하다거나 등등.. 그러나 맹자는 그 원인을 자신의 태도, 자신의 인자함, 자신의 지혜를 돌아보라고 합니다.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상황을 탓하거나, 남을 탓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돌아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마음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왜냐면 내가 탓한다고 남이 바뀌지 않고, 그 상황이 개선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풀이는 할 수 있어도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건 말이 아닙니다.


누군가 바꿔주지 않는다면, 주체의 작용, 즉 나의 작용을 통해서만 상황을 타개할 수 있습니다. 결국 상황을 능동적으로 바꾸는 것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물론 그 상대방이 바꿔줄 수도 있지만, 그건 바램일 뿐입니다.) 아들러 심리학에서 말하는 "결국 본인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 어떤 어려움이나 트라우마가 있어도 한발 내딛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래서 '용기'의 심리학이라고 합니다.


내 주변의 일과 사람 관계에서 변화를 원한다면, 나의 태도와, 나의 인자함과, 나의 지혜를 돌아보며, 스스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유가의 '수신(修身)'의 맥락이기도 합니다.


유가의 사상적 뿌리인 주역에서는 피동에 빠지는 것을 제일 안 좋은 점괘로 읽습니다. 음, 양, 음, 양의 각자의 자리가 있는데, 음이 양의 자리에 있거나, 양이 음의 자리에 있는 것을 안 좋게 봅니다. 그렇게 되면 상황에 지배되는 피동에 빠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대신, 음과 양이 제자리를 찾는 것, 그것을 제일 좋은 점괘로 읽습니다. 상황을 지배하는 주동에서 서기 때문입니다.


어떤 행동을 한다. → 내 감정이 상한다. → 그 상황이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 → 휘둘린다. → 피동에 빠진다. 그러나 여기서 그 상황에 영향을 별로 받지 않게 되면,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면, 상황을 다시 역전시켜, 나는 그 상황을 지배하는 주체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자>에서 말하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의 그 깊은 뜻은 삶의 주인은 '나'라는 선언입니다.


즉, '역지사지'가 단순히 나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다스리는 것이라면, '역지즉개연'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나를 다스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원인을 분석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 상대방에 조응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군자는 먼저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한 후에 행동하고, 마음을 편안히 한 뒤에 말하며, 사귐을 확고히 한 후에 남에게 바란다." 《주역》 <계사>



《맹자(孟子)》  《주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