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말만 남은 세상
"(클나)씨는 원래 그렇게 말이 느린 편입니까?"
기획MD 직군의 채용을 진행하는 한 패션회사 면접에서 막바지에 다다라 들은 질문이었다. 글쎄, 내가 말이 느린 편이었던가. 하지만 고민은 몇 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사라졌다. 면접관이 '궁금해서 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안 그런데, 말을 고르다 보니 긴장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형편없는 변명이었다. 면접장에서 긴장하지 않는 지원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더구나 말을 고르다니. 그거야말로 솔직하지 못한 태도 아닌가. 하지만 달리 어쩔 방도가 없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그렇다고 "예, 저 원래 느립니다. 불만입니까?" 할 수는 없잖은가.
며칠 후 면접 결과가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탈락이었다. 누구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트렌드를 읽어내야 하는 기획MD의 말이 느릿하고 어눌한 것은 그들로서도 수용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 억울했다. 내가 가진 능력은 그게 다가 아닌데. 말은 잘 못해도 글은 잘 쓸 수 있는데. 실제로 현장에서 고객을 만나야 하는 영업사원이라면 모를까, MD가 달변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말은 잘 해야 한다. 영업사원이 아니더라도. 왜냐하면 인간은 남에게 그다지 관대하고 헌신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떠 먹여줘도 의심하며 뱉어내는 게 요즘 사람들인데, (면접장에서)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말을 잘 못한다는 건 심각한 마이너스 요인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비단 면접 상황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여러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필수불가결한 조직 생활에서 말을 잘하는 능력은 중요하다. 하다못해 래퍼에게도 '딜리버리'가 엄청 중요하지 않은가.
그러나 말을 '빨리' 하는 것이 말을 '잘' 하는 것의 필요조건이 된 현실은 못내 아쉽다. 속사포처럼 내뱉는 말은 아니더라도, 충분한 시간을 들여 고르고 정제한 말에는 그만큼의 무게가 있는 것인데. 진중한 말은 점점 외면받고 가볍게 떠다니는듯한 말만 소비되는 오늘날의 세태(여기에는 SNS의 영향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에서 나 같은 '느림보'는 점점 설 곳을 잃는다.
하지만 더콰이엇(The Quiet)도 말했다.
"아직도 랩을 빠르게만 하면 잘하는 줄 아는 놈들, 이건 100미터 달리기가 아냐. 느껴봐라 음악의 영혼을."
물론 힙합과 말을 하는 건 좀 다른 영역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믿는다. 진중한 말의 힘을. 언젠가 나를 알아줄 세상이 도래할 것을. 그날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단어를 고른다.
by CLNA
[출처] 잡상 032. 느린 말|작성자 HELLO GEN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