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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일환 Oct 22. 2020

어릴 적 헤어진 엄마를 찾습니다.

미국으로 입양된 찰리 이야기

내가 살아오면서 마음속에 못내 잊지 못하고 아쉬움이 남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2009년 1월에 어느 페이스북 커뮤니티에서 자신을 낳아준 한국인 생모를 찾는 '찰리'라는 미국인이 있었다. 물론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여러 사람의 힘든 사연들이 있겠지만 자신의 눈에 들어온 사연이 대게 가장 안타깝기 마련이다. 당시의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용기를 냈는지 모르겠다. 나는 찰리에게 내가 헤어진 엄마를 찾도록 도와주겠다고 쪽지를 보냈다. 사실 그때는 몰랐다. 그 쪽지 보내기가 향후 10년 동안 나의 아쉬움으로 남을 선택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찰리는 나에게 깊이 감사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2009년 현재 미국에 살고 있으며,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의 얼굴도 모른 채 미국의 가정으로 입양되었다고 했다. 다행히 좋은 양부모님을 만나 지금은 번듯한 직업을 가졌다고 했고, 멋진 반려자를 만났다고 했다. 그 반려자의 이름은 '앨릭스'이다. 찰리는 앨릭스와 함께하는 이 너무나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에 생모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한(恨)이 되어 남아있다고 했다. 물론, 찰리가 한(恨)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건 분명 한국인의 한(恨)이라고 나는 느꼈다.


찰리는 나에게 자신이 입양되던 당시의 몇 가지 정보를 건네주었다. 많은 정보는 없었다. 영어로 표기한 생모의 이름과 찰리가 태어난 산부인과의 이름이 전부였다. 이것도 나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그 산부인과는 당시 내가 살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0년 전인 1999년까지는 말이다. 2009년 당시에는 이미 예전의 산부인과는 없어지고 새로운 종합병원이 그 자리에 들어서 있었다. 막막했지만 일단 정보를 수집해보기로 했다. 그 병원도 찾아가서 예전에 근무하시던 분을 아시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여기저기 입양기관에 전화를 해보기도 했다. 추적을 해나가다 보니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입양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좀 더 수소문 끝에 대구에 있는 한 지점에서 마지막으로 찰리를 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찰리의 마지막 행선지는 대구에 있는 한 홀트아동복지회 사무실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부모의 따뜻한 사랑 아래 있어야 할 소중한 아기였는데... 얼마나 무서웠을까? 물론 찰리는 기억할 수 없지만 말이다.


해당 기관에 전화를 걸어 사연을 설명해주니 당사자와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난 찰리의 연락처를 전달해주었고, 찰리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당시의 나는 취업준비생이었고 이제 내 밥그릇이나 찾으러 떠나야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정말로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30년 만에 아들과 엄마가 재회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말이다. 하지만, 결국 해당 기관에서도 생모를 찾을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기관에서 수소문을 해볼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서서히 그 일을 잊어가고 있었다.


2010년 한 해는 무척 바빴다. 신입사원이었기 때문이다. 간간히 페이스북 뉴스피드에 찰리와 앨릭스의 이름이 보이면 그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아름다운 결말을 못 맺어준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2011년에는 페이스북을 통해 앨릭스가 쪽지를 보내왔다. 찰리와 앨릭스는 결혼을 했다고 했다. 사진도 몇 장 보내줬는데 참 아름다운 커플이라고 생각했다. 앨릭스는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비록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내가 보여준 인류애와 헌신에 가족들 모두 항상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이 나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내가 그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늘 괴로웠다. 나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었지만 내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 찾아낼 수 없었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했다. 어쩌면 모친은 자신을 찾는 아들을 만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이미 다른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꾸렸을 수도 있고,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것이 내가 움직이지 않는 것에 대한 나름의 핑계였다.


나는 지난 11년 동안 벗어날 수 없는 미안함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나는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전체를 통제하지 못하면서 순간적인 이타심으로 여러 사람들의 인생에 개입한 것 아닌가?'

'내가 끝까지 책임질 수도 없으면서 사소한 선심으로 선량한 사람들에게 희망고문을 해버린 것 아닌가?'


내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그들은 어머니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2020년 1월, 처음으로 찰리에게 쪽지를 보낸 지 꼭 11년이 되던 날, 나는 회사에서 일하는 중에 페이스북 댓글 멘션 알림을 받았다.


앨릭스와 찰리는 마침내 그들의 가족을 찾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엄마를 마침내 만났다.

그들은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이 댓글은 한참 동안이나 내가 하던 일을 멈추게 만들었다.

나는 늘 미안했는데 그들은 나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어쨌거나 참으로 잘 되었다.

나와 찰리 그리고 앨릭스는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서로 다른 지역에 살지만 인간의 선한 본성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을 격하게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씩 찰리와 엄마가 만나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헤어져 있었다. 내 상상 속에서는 이제는 늙어 버린 어머니와 마흔 살의 찰리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40년 전의 젊은 엄마와 아기가 만나는 것만 같은 모습이다.


이제 내 마음속에 있는 아쉬움도, 후회도 어느 정도 떨쳐내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찰리와 앨릭스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찰리와 앨릭스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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