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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일환 Oct 10. 2020

먼저 떠난 그리운 친구에게

들어주지 못한 네 이야기


못 본 지 오래되었다.

이따금 네 생각이 난다.


나의 상수동 자취방에서 너와 보낸 마지막 시간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왜 그때 나는 좀 더 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그때의 나는 불안정했었다.

내 속에는 온통 불만이 가득했다.


세상은 나에게 반항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 무엇도 증명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었다.


이렇게라도 변명을 해본다.

서른이 넘고서야 비로소 '나'를 떼고 '나'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제야 그때의 내가 얼마나 거칠고 오만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네 동생에게 소식을 들었을 때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현실이 아니라고 느꼈다.

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너무나도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너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라고 말이다.

넌 똑똑했고 감성적이었고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매우 높은 친구였으니까 말이다.


난 너의 선택을 존중하지는 않는다. 비겁했다.

그 또한 지나갈 일인데 순간의 이기심으로 모든 것을 끝내버렸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삶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서로가 성장하는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는 것은 비극이다.

그 시절을 함께 공유할 수 없게 만든 것은 내 추억에 대한 도둑질이다.


못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이따금 네 생각이 난다.


나는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있다.

아참 딸도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아주 똑똑한 친구였다. 학교 성적도 우수했다. 성격은 다소 까칠했다. 돌이켜보면 나 이외에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친구는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친구와 자주 투닥거렸다. 언쟁을 벌이다 나는 종종 성질을 부리곤 했다. 내가 평온할 때는 본인이 성질을 부리고 내가 화를 내면 본인이 평정심을 찾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어쨌거나 참 얄미운 일이었다. 그 친구는 이상하게 나를 좋아했다. 나의 씩씩거리는 성격이 좋은 건지 뭐가 좋았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때로는 편지를 써주기도 했고 같이 등산을 갈 때는 도시락을 싸다 주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오해가 있을까 봐 밝히는데 우리는 둘 다 남자다. 우리는 꼭두새벽에 산을 오르는 것을 좋아했다. 새벽 서너 시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산을 올라가는 게 그렇게 스릴 있고 재밌었다. 산 정상에서 친구가 싸온 도시락을 먹던 기억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친구와 나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친구는 학교에서 문예부 동아리에 가입했다고 했다. 나는 컴퓨터 동아리에 가입했다. 친구는 나에게 글 쓰는 재미에 대해 알려주곤 했다. 친구는 윤동주 시인을 좋아했다. 본인이 쓴 시를 적어 나에게 보여주기도 했었다. 우리는 함께 비디오 게임을 즐기곤 했다. 오락실에 가서 철권이나 던전엔드래곤도 하고 PC방에 가서는 스타크래프트를 밤새 하기도 했다. 한 번은 2층에 있는 PC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여러 명의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여 돈을 빼앗긴 적도 있다. 사실 그때 나는 돈이 없어서 좀 맞았고 친구는 주머니에 있던 만원을 내고 맞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간접적으로 자본주의의 단면을 체험했다. 그 친구가 좋아하던 여자아이도 있었다. 친구는 그 여자아이에게 사귀자는 쪽지를 건네었다. 몇 시간 뒤 그 여자아이는 친구 옆을 지나가며 거절을 하는듯한 손짓을 하고는 지나갔었다. 사실은 그날이 PC방에 가면서 돈 뺏긴 날이다. 친구가 기분도 꿀꿀한데 자신이 PC방을 쏜다고 했다. 늦은 밤에 평소에 안 가던 PC방을 가다가 그 일이 생긴 것이다.


20살에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친구는 재수를 했다. 그때부터는 연락을 띄엄띄엄 주고받게 되었다. 그로부터 내가 취업을 해서 20대 후반에 서울에 올라가게 되기까지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추억이 없다. 다만, 나의 느낌으로는 이 친구가 재수를 하고, 군 생활을 힘들게 하고, 대학 연구실에서 괴롭힘을 받았던 3 연속 치명타 때문에 점점 사람이 변해간다는 것을 느꼈다. 중학교 시절의 똑똑하고 자신감이 넘쳐서 까칠하던 친구는 없어져 버리고, 자신감 없고 두렵고 피해의식이 있는 친구로 점점 변해갔던 것 같다.


살아있는 친구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친구가 세상을 떠나기 약 두 달 전인 상수동의 내 자취방에서였다. 친구는 석사 졸업을 앞두고 대기업 면접을 보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취업을 준비하던 여느 친구들처럼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었다. 나는 그때 신입사원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내 자취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칼퇴해서 냉큼 가겠노라고 이야기했다. 그날따라 꼰대 같은 회사의 상사는 이상한 트집을 잡아서 나를 집에 못 가게 했다. 아직도 그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오늘 같은 날은 다 같이 회사에 남아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근데 그날 아무 날도 아니었다. 오늘 같은 날이 무슨 날인지 아직도 미스터리하다. 그날 나는 밤 10시가 넘어서 퇴근했다. 집에는 11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내일이 면접임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나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자신이 연구실에서 받고 있는 괴롭힘과 부당한 대우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때 짜증이 났었다. 회사의 업무와 상사의 트집 그리고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음에 진절머리가 나있는 상태였다.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로 치부했다. 이상하게 그날 밤의 대화가 기억에 별로 없다. 아마도 나는 "그래 봐야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 아냐?" 정도로 치부했었던 것 같다. 다음날 새벽 친구는 면접을 보러 나갔고 나는 비몽사몽 하게 내 자취방 문을 닫고 나가는 친구에게 가벼운 손인사를 했다. 그 모습이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 그 친구를 볼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두 달 뒤 겨울쯤이었다.


연말 분위기가 씬 풍길 때 서울에 있는 고향 친구들 두 명을 만났다. 그날 아주 늦게까지 놀고 새벽에 자취방에 들어왔었다. 나는 그날의 이상한 일이 아직도 기억난다. 새벽 한 시경에 집에 들어와서는 잠이 안 와서 TV를 틀었다. 앉은자리 옆에는 생수통 하나와 리모컨을 두었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울 때마다 그 두 개의 물건의 위치가 자꾸만 바뀌어 있었다. 나는 공포체험을 좋았지만 심령적인 존재를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날은 어쩐지 내 몸의 촉각을 곤두서게 만드는 밤이었다.


이틀 뒤 주말에 어머니가 서울에 오시어 함께 내 차를 타고 마트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모르는 휴대폰 번호로 전화가 왔다. "형 안녕하세요. 저 OO형 동생인데요". 그 말만 들었는데도 이상하게 뒤에 나올 말이 이미 예상이 되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다가도 그때의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혹시 우리 형 언제 마지막으로 보셨어요?"라는 질문과 함께 친구가 자신의 자취방에서 스스로 목을 매었고 세상을 떠난 채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공교롭게도 친구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이상했던 이틀 전 그 밤이었다. 과학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나는 친구가 나에게 들렀다 갔다고 믿는다.


그 길로 부산으로 내려가 친구의 장례식장으로 갔다. 혹시 젊은 사람의 장례식장에 가본 적 있는가?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곳이다. 그 친구를 함께 알던 친구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사귀자는 쪽지를 건네주었던 그 친구도 왔다. 우리는 밤새 술을 마시다가 쪽지를 전달했던 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거절하지 않았다고 했다. 자기는 인사를 한 것인데 그 뒤로부터 친구가 자기를 피했다고 했다. 바디 랭귀지가 서로 통하지 않은 것이다. 2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다니 그 또한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친구의 발인 날은 오열의 도가니였다. 나도 장례식을 많이 다녀봤지만 그만큼 거대한 슬픔이 자리 잡은 장례식은 처음이었다. 친구의 모친은 몇 번이나 실신했다 일어나시기를 반복했다. 나도 울었다.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슬픔이었다. 나의 눈물에는 많은 후회와 회한이 담겨 있었다. '그때 내가 그 친구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줬더라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왜 나는 남의 고민을 내 잣대로 폄하한 건가?'


나는 친구가 죽은 뒤로 한동안 친구가 살아있다고 착각을 했다. 친구가 사실은 죽은 척 연기한 거라고 하는 꿈을 꾸기도 했고, 다른 나라에서 은둔하며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게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구분하는 게 한동안 힘들었다. 나는 나에게 그런 현상이 일어날 줄 몰랐다. 나는 내 정신건강에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고, 나 스스로 내 정신을 완벽히 통제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깨끗이 인지하는데 약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종종 '친구가 살아있었던 것 같은데?'라는 착각을 했다.


친구가 죽은 지 꼭 1년째 되던 해에 중학교 시절 그 친구와 자주 가던 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소주 한 병과 주전부리도 가져갔다. 나는 그날이 살아서 만난 건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그 친구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친구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친구가 나에게 남긴 것은 '삶에 대한 강한 열망'이었다. 나는 친구의 죽음을 보며 더 강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제는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나지 않는다. 내가 이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자꾸만 잊혀 가는 내 어린 시절의 소중한 친구를 이렇게라도 남겨놓고 싶어서이다.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다.

"나 이제 들을 준비 됐다. 이야기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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