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글을 쓰기엔 시기가 조금, 아니 많이 늦었다. 고등래퍼2에서 김하온 씨가(현재 활동명 HAON) 이번 글에서 보려는 랩으로 이슈가 되었던 건 벌써 6년 전인 2017년이니까. 그리고 내가 이 랩을 처음 들은 건 21년이었고. 하지만 진정한 명곡, 혹은 예술은 시대를 불문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준다지 않던가. 그 사실을 엊그제 이 곡을 다시 들으며 깨달았다. 2년 전 놀람과 감탄에서 나아가, 이번에는 가사 한 줄 한 줄 여러 철학사조와 아트씬의 작품들이 생각나 이 글에서 정리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김하온의 사이퍼(Cypher)를 톺아보기 전에, 사이퍼가 뭔지 알아보자. 사실 내가 사이퍼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되었던 건 권혁수의 유튜브였다. 당시 궁금해서 찾아보니, 사이퍼틑 둥글게 래퍼들이 모여서 즉흥적으로 한 비트에 여러 래퍼들이 합을 맞춰 각자의 프리스타일 랩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하더라. 아마 왼쪽 영상에선 사전 합의 없이 대본없는 개그라는 맥락에서 사용한 듯 하다.
안녕 날 소개하지
이름은 김하온 직업은 traveler
취미는 tachi meditation 독서 영화 시청
랩 해 터 털어 너 그리고 날 위해
증오는 빼는 편이야 가사에서 질리는 맛이기에
나는 텅 비어 있고 proly 셋 정도의 guest
진리를 묻는다면 시간이 필요해
let me guess
첫 번째 포인트는 태극권(Ta chi)이 취미라는 그가 논하는 비움의 미학이다. 디스, 플렉스가 판을 치던 힙합계에 증오를 빼고 진리를 말하자는 고등 랩퍼라니. 신선했고, 또 이게 보여주기식의 멋부리기가 아니라 스스로의 고뇌에서 출발한 사유라는 게 곡 전체에 드러나있다. 비움이라는 키워드에서 우선 직관적으로 기독교의 자기비움(Kenosis) 대승불교의 공(空) 사상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는 곧, 작품을 비움으로서 공간이 채워지는 작업을 보여주었던 이우환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이우환 작가는 작가뿐만 아니라 동시대 예술에 대한 평론을 진행하기도 했다. 일본 니혼대학교 철학과에 재학했던 그는 대학 시절에 철학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와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예술론과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의 현상학, 노장사상과불교사상, 니시다 기타로(西田畿多郞)의 장소론 등을 공부했다고 한다. 이우환 작가에게 예술 작품이란 관객과 사물, 시간, 장소의 현상학적 만남이다. 이 순간 무한의 영역이 열리며 자아가 없는, 무(無)의 상태로 되는 것이다.
(참고 -http://kor.theasian.asia/archives/293355, https://www.joongang.co.kr/article/5114649#home)
아니면 너의 것을 말해줘 내가 배울수있게
난 추악함에서 오히려 더 배우는 편이야 man
김하온씨가 이 랩을 했던 것과 같은 해에 서울대 미술관에서는 <예술만큼 추한>이라는 전시가 열렸었다. 아름다움과 반대되는 ‘추’(醜)의 감각에 초점을 맞추어, 불결하거나 하찮거나 징그럽고 참담한 모습들을 보며,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한 질문과 새로운 기준으로 부상한 추함을 작가 13명의 회화, 조각, 영화, 설치 작품 50여점으로 보여주었다.
과거 고딕미술, 그리고 바로크 미술이 비례/정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당대 미적 기준에서 아름다움이 아니었지만, 오늘날 하나의 미술사조로 여겨지는 것처럼, 기존 미술관과 반대선상에서 새로운 미의 갈래가 되었던 역사가 있다. 근현대로 와서는 장 뒤뷔페 아르 브뤼를 통해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사실성을,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애브젝트(abject)개념을 통해 열등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겨지던 여성의 분비물을 미의 관점에서 다룬 바 있다.
거울 보는 듯한 삶
mirror mirror on the wa wall
관찰하는 셈이지 이 모든걸 wu wut.
거울이 등장하는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업과 댄디즘 보들레르의 소요자 개념으로 또 풀어낼 수 있을 듯하다.
뻐 뻔한걸 뻔하지않게 switch up
뻔하지 않은 게 뻔하게 되는 중이니까 ya know
얼마전 리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카텔란의 전시에서 바나나를 먹는 퍼포먼스를 진행한 미학과 재학생의 이슈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행위는 하온의 가사처럼, 뻔하지 않으려 했으나 뻔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미 아트바젤에서 카텔란의 작품을 의도적으로 훼손한 경우가 있었고, 이번 노씨의 퍼포먼스는 해당 사건을 답습한 것 이상으로 보기 어려워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SNS를 통해 사람들은 비일상적 행위에 대한 노출이 일반화되었고, 그에 대한 기대치또한 높아졌다. SNS에서 그사세 사람들과의 소통마저 가능한 진기한 일들이 일어나고, 실제 본판과 다른 얼굴을 서로 아바타처럼 인정하며 칭찬이 오가는 세계를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행위는 일말의 감흥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추가로 이번 그의 행위 자체 보다는, "서울대에서 미학을 전공하는 제 지인이 리움미술관 카텔란의 작품을 먹었습니다!"라고 셀프 인증하는 행위가 오글거리는 지점이자 비호감을 자아내는 부분이 아닐런지. 그는"제가 현대미술을 보면 이런 기획은 없었던 것 같아서, 장난삼아서 한 번 붙여놓고 나왔어요."라고 했지만, 나만 몰랐을 뿐 세상에는 내가 생각하는 걸 안 생각해본 사람을 찾는 게 오히려 더 어려운 편이다.
I ain't trynna be something
I just trynna be me
나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자존감, 자신만의 콘텐츠, 신념의 척도 등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가 가능하다. 모종린 교수님의 책에서도 알 수 있듯, 나다움은 내가 사는 곳 혹은 살고 싶은 곳, 나의 직업, 나의 라이프스타일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키워드다
그대들은 verse 채우기 위해서 화나 있지
물결 거스르지 않고 즐겨 transurfing
원한다면 곧장 내 손으로 들어올테니 um
삶을 유지하기위해 얻는 다양한 압박으로 항상 긴장과 불안상태에 놓여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분노는 때때로 모르는 사람에게 분출되곤 한다. 문제는 사소한 그 분출로 인해 뜻하지 않게 삶이 꼬이기도 하며 자승자박, 자초위난의 고난을 겪기도 한다는 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익명에게 무관심을 유지하다 때때로 적대감을 표하기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개인의 자아와 자아가 대면하는 순간 인간 화해의 가능성이 슬며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같은 맥락에서, 이 드라마도 해석의 여지가 많고, 엊그제 일어난 시카고 총기사건과 연관시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생이란 이 얼마나 허무하며 아름다운가
왜 우린 존재 자체로 행복할 수 없는가
우린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 중인가
시립미술관에 고갱전시를 했을 때 이 작품을 봤던 기억은 여전히 내게 소중한 미술 경험 중 하나로 남아있다. 미국의 기독교 철학자 프란시스 쉐퍼는 이 작업 직후 고갱이 자살한 것을 두고 고갱이 자살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암시했다고 보았는데, 그는 고갱의 답이 "온 곳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며, 갈 곳도 없다는 것이다."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원해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울러주는 답
배우면 살아 비록 학교 뛰쳐나왔어도
깨어 있기를 반복해도 머리 위로 흔들리는 pendulum
난 꽤나 커다란 여정의 시작 앞에 서 있어
따라와줘 원한다면 나 외로운건 싫어서
시작부에서도 나왔던 말이다. 배우는 삶. 이 때 하온의 배움은 혼자 방에 틀어앉아 책을 읽고 웹을 검색하며 얻는 배움이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다른사람과 함께함으로써 가능한 배움이다.
분량조절에 실패했다는 웹툰 작가들이 이런 상황이었을까. 생각보다 하나하나의 주제를 풀어내는데 다시 찾아봐야할 것도많고 내용도 많아서 간단하게만 짚었는데 개별 번호에 대해 하나하나 풀어보는 시리즈를 시간이 생기면 진행해봐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