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내가 ‘무채색’이라는 것이었다. 왜 내겐 나만의 취향이 없을까? 왜 나는 남들처럼 하나에 푹 빠져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덕질해 본 적이 없을까 궁금했다. 좋게 포장해서 말할 땐 그저 나는 카멜레온 같은 사람이라 말을 했었다. 딱히 하드코어인 부분이 없어 오히려 어디에나 잘 어울리고 또 무엇이든 시작하고 알게 되면 좋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이다.
실제로도 나는 그렇게 20대를 보냈다. 일단 어느 분야든 한번 발을 들이면 혹은 그게 일이 되면 나 스스로 설득을 꽤 잘하는 편이었다. 내가 만드는 서비스를 사랑했고, 내가 마케팅하는 제품이 최고라 믿으며 커리어를 쌓았다. 그냥 나를 가스라이팅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 처하면 나는 애초 그것이 나의 꿈이었고 하고 싶었던 일이었던 것처럼 돌변했다.
그런데 일은 그렇게 잘해왔는데 막상 나라는 사람, 개인은 계속 텅텅 빈 느낌이었다.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는 사실이 나를 꽤나 슬프게 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에게 어떻게 본인의 확고한 취향을 찾았고 가질 수 있었냐며 물었다.
“써니야, 취향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하고 떨어지는 게 아니야. 네가 선택하고 지속해 나가는 거지. “
그래서 덴마크에 오고 나서 한동안 취향 찾기 프로젝트를 했었다. 덴마크가 워낙 디자인으로 유명한 나라다 보니 가구, 조명, 인테리어 등 다양한 브랜드 쇼룸에도 가보았다. 브랜드와 디자인을 잘 아는 친구들에게 묻고 물어도 왜 이 브랜드가 이토록 명성이 높은지 또 왜 이리 비싼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스토리텔링 자체가 내겐 설득이 되지 않았다.
물론 내가 꼭 덴마크 디자인과 브랜드를 좋아해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분야와 관심사가 다 다르니 나는 그냥 저쪽에 관심사가 없는 걸까 싶었다. 그래서 이번엔 조금 더 쉽고 간단한 것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음악, 영화, 색깔 등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나의 취향을 찾아가면 찾아갈수록 느낀 건 바로 이도 저도 아닌 혹은 잡탕이라는 결론이 나왔고 꽤나 속상했었다. 여러 다양한 분야를 미지근하게 알고 좋아하는 것이 나쁜 건 아니지만 나도 나만의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게 정말 나를 온전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믿었던 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취향 찾기 프로젝트는 내게 부담이자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냥 이것도 나야!라는 마음으로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확고한 취향이 없어도 잘 먹고 잘 살아왔기에 굳이 그렇게까지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오늘 문득 어떤 큰 깨달음을 얻게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빈티지 가구와 인테리어 소품을 수출하는 일을 하고 있는 지인이 내게 플리마켓에 함께 가지 않겠냐며 제안을 했다. 그는 그곳에서 북유럽의 오래된 엔틱 제품들을 구매한다고 했다. 우리는 플리마켓에 갔고 그는 내게 열심히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이건 이런 브랜드고, 최고의 덴마크 디자이너 작품이고 이런 이유로 비싼 거라면서.
사실 나는 플리마켓에 있는 제품들을 보며 드는 생각은 딱 한 가지였다.
저런 걸 진짜 사는 사람이 있나? 대체 누가, 왜 사지?
남이 쓰던 30년도 더 된 의자와 접시를 몇만 원, 몇십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산다니. 마케팅과 브랜딩을 업으로 삼은 사람인지라 당연히 브랜딩의 힘임을 알고 있지만 마케터가 아닌 소비자로서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새 상품을 구매할 때도 브랜드 보단 상품의 퀄리티와 가격 그리고 가성비를 보고 구매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명품에도 관심이 없고 브랜드 충성도라는 것이 제로인 어쩌면 최악의 고객군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러자 지인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하며 각 브랜드의 히스토리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면 각 조명마다 색감과 모양도 다르고 각각의 브랜딩이 되어 있는 거라고. 처음엔 본인도 이런 걸 대체 누가 사는지, 왜 사는지 그리고 이 많은 덴마크 브랜드들의 차이점을 알지 못했다고 말이다. 그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이해는 가지 않았고 나의 지갑을 열지는 않았지만 문득 어떤 생각이 들면서 혼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말 취향을 선택하지 않으며 살아온 거구나. 나는 그럴 심적여유와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거구나.
그랬다. 돌이켜보면 그럴 만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살면서 배가 고파서 울거나 굶어본 적도 없고 그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해서 고생한 적도 없다. 하지만 20살이 되던 해, 갑자기 집안 환경이 안 좋아지면서 하루아침에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했다. 나한텐 너무나 큰 충격이었고 공포로 다가왔었다. 그래서 주변 다른 친구들보다 빨리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심리적 독립을 해야만 했다. 즉 나의 20대 내내 내겐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당시 나는 내가 취향을 가진다는 것이 사치라는 것을 알았던 건 아닐까 싶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20대 그리고 내 성격과 성향을 생각해 보면, 차라리 내게 확고한 취향과 취미가 있었으면 오히려 불행했을 것 같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꼭 취향이 비쌀 필요는 없다. 누군가에겐 취향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용기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첫 사회생활 시작 당시 500만 원 보증금이 없어 창문이 없는 고시원에 살면서 인테리어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빨리 원룸으로 가고 싶었다. 방음이 되지 않고 창문이 있어도 열 수 없는 원룸에 살면서 무언가를 집에 채워둘 생각도 못했다. 남편과 연애 시절, 500원이 없어 싸우고 울었던 사람에게 취향은 사치가 분명했다. 무엇보다 해외 이곳저곳을 이동하며 사는지라, 결국 내 집이 아니라는 이유와 또 떠날 거라는 마음에 소유욕이 없었던 건 아닐까 싶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닌 어떤 문화생활도 사실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돈, 시간 그리고 심적 여유가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건 아닐까 싶어 나의 지난 20대를 돌아보았다. 물론 그렇게 살았던 것이 후회가 되거나 잘못된 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냥 뭐랄까, 고생 참 많이 했구나 싶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보다 더 힘들게 이 세상에 산사람이 수천 아니 수만 명이 있다는 걸 알지만, 나는 나의 기준에 힘든 시간을 오래 보냈었다.
내가 갑자기 취향을 찾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어쩌면 심적 그리고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괜스레 자랑스럽고 뿌듯하기까지 했다. 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살아온 나를 칭찬하고 싶단 생각도 했다. 그러다 친구와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나의 플레이리스트와 2023년 동안 내가 들었던 아티스트와 곡을 살펴보니 나의 취향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분명한 패턴이 있었다. 그저 나는 자세히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던 게 맞았다. 그러다 또 집에서 나의 옷장을 살펴보았다. 내가 주로 입는 옷은 어떤 옷인지, 그저 내게 어울리는 컬러톤 말고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이제야 진짜 나의 취향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무엇보다 취향 또한 지속적으로 변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무엇보다 내가 예전에는 많은 것들을 일부러 차단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물건의 경우 어차피 비싸서 못 살 거고, 나랑 관련이 없는 분야라고 생각해서 호기심이 많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다. 닫힌 마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남들의 취향이 궁금하고, 배우고 싶고 겪어보고 싶다. 왜 그들은 이 특정 브랜드를 옹호하는지, 소비하는지 혹은 누군가를 동경하는지 남에게도 관심이 가게 되었다. 취향이 없던 것이 아니라 찾지 않게 꽁꽁 숨겨두려고 했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고 집착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면 우린 모두 각자만의 고유한 색이 있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 나의 20대는 그저 먹고 사느라, 입에 풀칠하느라 무채색이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누구에게나 취향은 있다. 분명히 있다. 카멜레온 같아 보여도 그 속에 진짜 나만의 의견이 있다. 나처럼 취향이 없어 고민을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일단은 마음의 여유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보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열심히 현실을 사느라 그런 것뿐이라고, 당신의 색이 없는 게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