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 Choi 메덴코 Jun 06. 2019

영화 기생충, 그 꿉꿉함과 먹먹함

영화를 보고 나니 돈에서 악취가 나는 것 만 같다.

기생충 보셨어요? 한국 떠나기 전에 꼭 보고 가세요.


동료 두 명이 얼마 전 내게 기생충을 보았냐고 물었다. 한 동료는 그걸 보고 나니 너무 찝찝한 마음이 든다고 하였고 다른 동료는 내게 내가 싫어하는 한국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도 정확하게 모르는 내가 싫어하는 적나라한 한국이 궁금했다.


다만 사회를 풍자한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둘은 꼭 내게 인도네시아에 떠나기 전 영화를 보고 가라고 추천해주었다.


그리고 비가 올 것만 같은 묵직하고 쾌쾌한 날씨에 나는 혼자 눈을 뜨자마자 기생충을 보러 갔다.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10대로 보이는 사람들부터 50대의 사람들까지, 공휴일이라 다들 영화관에 온 듯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영화관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똑같은 영화를 반복적으로 보는 습관과 스포일링을 당하지 않으면(내용과 후기를 알지 않을 경우) 새로운 영화를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회사에서 사람들로부터 대략적인 줄거리를 들었으니 흥미진진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감상을 하기 시작했다.


봉준호 감독의 특유의 유머 코드가 가장 눈에 익었다. 그리고 그 속 안에 숨어있는 주옥같은 명대사들과 장면들을 보며 속으로 감탄하고 울기도 했다. 그리고 나도 동시에 동료의 말처럼, 영화가 끝나자마자 왠지 모를 먹먹함과 꿉꿉함이 생겼다. 찝찝함이라기 보단 왠지 돈에 대한 환멸감이 들었다. 그리고 천 원짜리 한 장에서 왠지 모를 악취가 풍기는 것만 같았다.


이 불편한 영화가 내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설명할 수 없는 이 환멸감과 동시에 느껴지는 불편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살펴보니, 주옥같은 명대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판단 지었다.



부자인데도 착해.
부자니까 착한 거지

이 두 문장이 비수를 꽂는 것만 같았다. 부자인데도 착하다는 그 놀라움과 편견 그리고 부자라서 착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와 닿았다. 개인적으로, 마음의 여유는 경제적인 힘에서 나온다고 믿는 1인으로서 너무나도 공감이 가는 한 마디였다. 부자이기에, 금전적으로 넉넉하기에 착할 수 있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겪어보았다. 그래서 저 말이 나의 가슴에 비수가 되었다.




부자는 죄가 없다



모든 부자가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유난히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자를 싫어하고 경멸하고, 그들의 부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누군가의 부유함을 부정하려는 인식 속에서 커왔다. 그리고 부자들은 모두 나쁠 거란, 갑질을 할 것이란 편견과 그들의 돈은 신성한 노동의 대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착각.


하지만 내가 만나 본 부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저 영화와 같이 그들은 정말 마음이 넓었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그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것 만 같아 보였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한때는 자격지심으로 그들을 시기하고 평범한 나의 삶과 비교하며 슬퍼한 적이 있던 것 같다.


부모님의 사업이 실패로 끝나며 점점 가정환경이 어려워졌을 때,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당연하게 누리던 삶이 특별한 삶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현실을 부정했다. 그리고 그 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못되고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항상 티 없이 밝고 행복해 보였다는 내가, 남들에게 늘 베풀 줄 알았다는 나를 나는 더 이상 낯설어졌다. 그리고 내가 맞닥뜨린 현실과 싸우기 위하여 내가 누렸던 삶을 뒤로함 채, 이제 그 현실을 소유한 이들을 위해 일하면서 왠지 나를 동정하는 것만 같은 그들의 태도에서 적지 않은 분노와 슬픔을 느껴본 적도 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들의 리그에 당당히 맞설 수 없다는 그 높은 문턱을 알게 되었다. 영화 마지막 장면과 오버랩이 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더욱더 마음이 먹먹해졌달까? 그리고 반드시 그 자리에 올라서야만 할 것 같은 그런 압박감이 너무 역겨웠다. 이대로 살아도, 충분히 나답게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며 나를 책임질 수 있는 급여를 받으며 살아가는데도 무조건적으로 한 단계 올라가야 할 것만 같은 이 무언의 압박이 나를 더 옥죄이는 것만 같았고, 빨리 다시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만나본 빈부격차



나는 지난 28년 생활 동안 내가 만난 많은 세상 중, 세 국가로 나누어본다면 '한국', '인도' 그리고 '덴마크'로 나눌 수 있다. 태어나고 평생 가장 오래 살았던 소속되어있는 한국과 제2의 고향인 인도 그리고 새로 만난 세상 덴마크는 내게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너 우리 아빠한테 말해서, 팔아버린다?



나는 인도에서 유학을 할 때 빈부격차의 끝판왕을 보며 살았다. 저 무시무시한 말은 실제로 내가 인도에서 목격한 일이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한국인으로서는 충분히 평범한 누구나 갈 수 있는 학교였지만 세계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심한 인도에선, 내로라하는 인도 갑부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정치계 아들, 딸들과 인도 최대 기업의 자손들 심지어 사라진 인도 왕족 계열의 집안까지. 모두들 단지 학위가 필요해서 학교에 입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바로 부모님의 회사 또는 정치계나 연예계로 빠질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아주 극소수로 평범한 집안의 친구들도 있었다. 그래서 학교 내에 집안에 따라 함께 무리 지어 다니는 그룹이 나뉘어 있었고, 운 좋게 나는 유일한 외국인으로서 모든 그룹과 두루 지낼 수 있었다.


그중 엄청난 재벌집 친구 무리에서 싸움이 난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싸움 스케일은 일반 학생이 싸우는 것과 아주 달랐다. 아빠에게 말을 해서 너를 팔아버리겠다는 둥, 너네 아빠 사업 파트너를 뺏어 오겠다는 둥. 정말 일반인이 듣기 힘든 그런 문장들이 오고 갔다.


반면에 NGO단체에 몸을 담게 되면서 인도에서 가장 빈익한 동네에서 살아보게 되었다. Teach For India라는 소속에서 인도 빈민가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내가 살면서 본 적 없던 동네와 상상하기 힘든 환경들을 보곤 했다.


정말 딱 이 말이 떠올랐다.


돈에서 악취가 난다.



물론 인도는 문화와 종교에 따른 빈부격차도 상당하다. 아직 계급사회가 남아있는 이곳에서 나는 실시간으로 빈부격차를 느낄 수 있었다. 학교에 출근을 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과 의문점이 남기 시작했다. 대체 가난과 부유함의 격차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 기준은 무엇인지 말이다. 단지 '돈'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말이다.


슬럼가에서 일을 하며, 점심시간마다 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배가 아프다며 울었고 나는 당연하게도 그 아이를 위해 약을 주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매일 똑같이 울었는데,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나의 기준에서 생각할 수도 없는 말을 듣게 되었다.


"선생님, 저 아이는 배가 고파서 우는 거예요.

그래서 배가 아픈 거예요"


듣자마자 나는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내 머릿속에서 절대 그려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모님의 사업이 실패했어도 나는 지붕이 있는 집에서,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었다. 예전만큼 부유한 생활과 사치를 하지 못했을 뿐. 단 한 번도 배가 고파서 울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아이의 아픈 배가 굶주림에서 올 것이라는 것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고 고로 나는 천진난만하게 약을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혼란스러웠다. 한국에 돌아올 때마다 보고 느끼는 부의 기준이 너무나도 모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으로, 그들을 동정하고 나의 삶을 감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굉장히 이기적인 태도라고도 느껴졌다. 나보다 더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이들이 있으니 나는 행복한 거라고 믿고 감사하는 태도가 되러 나는 너무나도 불편하다고 느꼈고, 그렇다고 항상 나보다 힘든 사람들을 보며 안도를 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태도마저 찝찝했다.


돈이 필요하고, 돈이 좋지만 돈이 너무나도 싫다. 돈에서 나는 그 악취가 너무나도 역겹고 환멸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돈의 맛은 너무나도 달콤하다.


그렇다 보니, 영화 기생충을 보고 나는 다시 꿉꿉하고 먹먹한 마음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결론이 없는 이 감상평은, 그저 나의 알 수 없고 복잡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자 쓴 글로서 어쩌면 영화 후기와는 동 떨어졌음을 안다. 그저 다시 한번 삶에 대해 생각을 하게끔 해준 영화 '기생충' 그리고 이런 가치 있는 영화를 제작해주신 봉준호 감독님께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른 살,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서 울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