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 시아마(2020),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카메라 안팎에서 남성의 시선을 찾을 수 없어 편안했어요.”라는 말로 입을 열 것이다.
카메라는 의도이자 권력이다. 배우의 연기는 감독의 연출을 통해 관객에게 전해진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연출자의 시선을 공유한다. 남성 감독의 시선으로 여성의 성애를 드러내는 장면이 심심찮게 여성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는 이유다. 특히 레즈비언 연애가 소재인 경우, '남성 감독의 시선'은 여성 간 성적 행위가 감독의 판타지적 욕망에 머무는 1차원적 한계부터 레즈비언이 함의하는 '퀴어함'은 제거되고 행위를 묘사하는 데 그치는 한계까지 폭넓게 적용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섹스를 다룬 방식은 흥미롭다. <아가씨>에서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은 남성 권력을 부수는 근본이며, 둘은 섹스라는 가장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아가씨'의 섹슈얼리티를 지배했던 남성 권력을 전복한다. 두 여자의 사랑과 섹스가 영화가 페미니즘을 외치는 장치이자 도구인 셈이다. 페미니즘을 전하는 장치가 섹시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둘의 섹스 씬은 다소 웃기다고 느낄 정도로 선정적이고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다. 영화가 남성 캐릭터들의 성적 욕망과 판타지를 보여줄 때 느껴지는 의도적인 우스꽝스러움이나 기괴함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림처럼 예쁘고 대칭적인 구도나 '굳이?' 싶은 자세와 도구를 보며 웃음이 나오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개봉 당시 일부 남성 관객은 감독의 전복 의도 때문에, 일부 여성 관객은 감독의 시선 때문에 섹스 장면을 보며 불쾌함을 느끼는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는 이런 점이 없다.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와 그의 결혼식 초상화 의뢰를 받은 화가 마리안느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영원히 꺼지지 않을 사랑의 기억을 담은 걸작"이라고 소개되는 이 영화에서 감독은 두 사람의 성애를 세세하게 전시하지 않는다. 두 여자의 나체는 몹시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내지만, 그들 사이의 성적 긴장감은 극도로 절제되고 세련된 방식으로 보여준다. 둘의 눈맞춤이나 몸짓, 표정을 담는 카메라는 이러한 은유를 통해 오히려 섹슈얼함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작위적이지 않은 성적 긴장감은 자연스레 일상의 다른 사건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를 체감하며 감탄한 장면이 있다. 엘로이즈가 처음으로 초상화 포즈를 취한 날이었다. 마리안느는 몇 번쯤, 엘로이즈를 보다 눈을 피하기를 반복한다. 이내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림을 그린다. 다음 장면은 같은 날 밤 침대에 혼자 누워 있는 마리안느다. 그 장면은 마리안느가 월경을 시작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그녀의 월경은 물 흐르듯 하녀 소피의 임신중단 결정으로 이어진다. 천재적이다.
소피의 임신중단을 매개로 영화는 '하녀'와 여성 '화가'와 '귀족' 아가씨를 한층 더 깊이 보여준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상류층 아가씨 엘로이즈, 여성 예술가 마리안느, 하녀 소피는 다른 위치에서 다른 삶을 산다. 소피의 임신중단 과정은 여성의 몸과 결정권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각기 다른 계급이 몸이란 공통분모를 통해 연대하는 과정이다. 이들이 교차하며 관계를 맺고 연대하는 모든 장면은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한껏 담으며 이 영화가 단순히 레즈비언 로맨스를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화에는 여성의 몸과 결정권, 계급에 따라 달라지는 억압의 형태, 주체(화가-감독)와 대상(모델-배우) 간 권력관계 등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으나, 영화가 이를 전달하는 방식은 담백하다. 계몽의 의도, 비장함, 감정의 강요 따위가 없다. 삶의 배경이고 일상의 사건들이기에 분리될 수 없는 요소를 굳이 삭제하지 않고 보여준다는 느낌에 가깝다. 강렬함은 메세지의 강조가 아니라 장면으로 전달된다. 저 유명한 모닥불 장면이 대표적이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소피를 따라 마을 여자들의 '나들이'에 참석한다. 한밤중, 여자들이 모닥불 주위를 돌며 노래를 부른다. 나들이라기엔 엄숙하고 진지하며 어쩐지 초현실적인 분위기에서, 엘로이즈의 치맛자락에 모닥불이 옮겨붙는다. 뚜렷한 명암의 대비는 언뜻 엘로이즈가 실재하는 인간이 아닌 듯한 느낌을 준다. 타오르는 채로,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바라본다. 둘은 서로 응시한다. 마침내 감정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 마을 여자들의 노랫말이 점점 커진다.
이처럼 영화의 미장센은 장면 하나하나를 명화처럼 보이게 할 만큼 미술적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중요한 매개 역시 그림이다. 마리안느가 의뢰받은 초상화의 목적은 엘로이즈의 결혼이었다. 마리안느가 그린 첫 번째 초상화는 중매 성사라는 목적에 충실했다. 엘로이즈의 존재감과 생명력을 비운 자리에 사회가 바라는 귀족 아가씨의 모습을 담았다. 거기엔 작가인 마리안느의 시선이 들어갈 자리도 없었다. 마리안느가 그 초상화 속 엘로이즈의 얼굴을 뭉개고 다시 그리기로 결정하는 순간부터 많은 것이 바뀐다.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소피의 임신중단 수술이 진행된다. 소피와 엘로이즈는 마리안느 앞에서 이를 재연하고, 마리안느는 그들을 그림으로써 이를 재현한다. 그림은 세 명의 여자가 계급을 지우고 함께한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 후, 다시 그린 엘로이즈의 초상화에는 마리안느의 시선이 담긴다. 그림엔 정적이고 관행적인 아름다움 대신 자연스러운 생명력이 있다. 영화가 그리는 두 여성의 몸이 자연스러운 것과 닮았다. 가슴이 드러나도, 알몸이어도, 성적 대상화되지 않은 몸은 그저 자연스럽고 편안하며 사실적이다. 그래서 되려 충격적이다. 엘로이즈의 겨드랑이에 털이 있는 게 놀라운 것처럼.
한편,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 이야기는 관객에게 결말을 알린 채 전개된다. 영화가 차용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가 인물 간 대화를 통해 직접 등장하기 때문이다. 영화 중반부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소피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읽고 각자의 해석을 나눈다. 죽은 에우리디케를 살리려면 뒤돌아 보지 말라는 조언을 어겨 그녀를 영원히 잃어버린 오르페우스를 소피는 이해하지 못한다. 오르페우스의 선택에 대한 마리안느의 해석은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이다. 마리안느를 빤히 바라보던 엘로이즈는 이내 응답한다. “에우리디케가 그렇게 하라고 했을지도 몰라요, 뒤돌아보라고.” 이 장면을 시작으로 둘의 모든 교류는 더욱 애틋해진다. 모든 순간이 끝을 알고 사랑하는 이들의 몸짓이 되기 때문이다. 다툼, 눈물, 웃음, 후회하지 말고 기억하자는 다짐, 기억하겠다는 약속, 낙서로 남긴 누드 자화상. 초상화가 완성되고,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돌아오고, 마리안느는 집을 떠난다. 문을 나서는 찰나, 뒤돌아보라는 목소리에 몸을 돌린다. 마리안느의 시선 끝에는 하얀 신부복을 입은 엘로이즈가 있다. 문이 닫힌다.
시간이 흘렀다. 여성 화가 마리안느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한다. 가만히 서 있는 그녀의 뒤로 절벽으로 떨어지는 에우리디케와 그녀를 바라보는 오르페우스 그림이 보인다. 그곳에서 마리안느는 초상화를 통해 결혼한 엘로이즈와 재회한다. 카메라는 마리안느의 시선을 따라 그림을 보여준다. 존재감과 생명력 대신 관행으로 채운 엘로이즈의 얼굴에서 어린 딸의 얼굴로 옮겨간다. 시선이 향하는 마지막은 엘로이즈가 들고 있는 작은 책이다. 책의 28쪽에 손가락이 끼워져 있다. 마리안느가 자신의 누드 자화상을 그려준 페이지다. 공간이 바뀐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이 울려퍼지는 대극장에서, 카메라는 엘로이즈의 얼굴로 다가간다. 그 곡은 언젠가, 음악을 알려달라는 엘로이즈에게 “음악은 말로 설명할 수 없어요.”라며 마리안느가 피아노로 치던 곡이다. 배경음악이 거의 없는 영화에서 불현듯 쏟아붓는 음악은 이내 뚝 끊긴다. 화면을 가득 채운 엘로이즈의 얼굴도 사라진다. 카메라를 따라 고조되던 감정은 갈 곳을 잃고 깊숙이 가라앉는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가부장제를 위협하는 존재로서의 레즈비언의 삶'을 언급하며 '레즈비언의 비극은 역사에서 지워진다는 점'이라고 한 적 있다. 레즈비언과 삶을 모두 한껏 보여주는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은 그 비극을 거부했다. 테레사 드 로레티스의 말을 빌리면, 감독은 "가부장제가 재현해 내는 이미지로서의 대문자 여성(Women)"이 아닌 "실존하는 소문자 여성에 대한 말"을 만들어낸 것이다(손희정, 2019에서 재인용). 여성의 몸으로 이뤄지는 레즈비언의 사랑과 삶을 말할 때 여성의 몸, 삶, 성애는 서로 뗄 수 없다. 그럼에도 가부장제가 불허한다는 이유로 실존하는 레즈비언과 여성애는 쉽게 왜곡되거나 지워지곤 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것들을 한데 모아 극도로 세련된 방식으로 재현한다. 여성의 몸과 삶과 사랑을 그린다.
참고문헌
손희정(2019), “여성의 이야기는 어디로 갔는가: 스크린 페미사이드와 스페이스 오프”, 이나영(편),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의 격발』, pp.119-136, 파주: 돌베개.
커버 이미지 셀린 시아마(2020),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