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리부트와 미디어 속 여성 재현
2015~2016년을 기점으로 대중화된 페미니즘은 한국 사회의 많은 영역에 변화를 가져왔다. 대중문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손희정(2015)은 2015년 이후 일련의 흐름을 ‘페미니즘 리부트(reboot)’로 명명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비사회의 대중문화와 대중 미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포스트-페미니즘’의 자장 안에서 등장한 ‘페미니즘 리부트’의 정치경제적 조건들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그것의 문화적인 성격, 그리고 대중문화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그의 말대로 대중문화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페미니즘 리부트의 양상 중 하나는 페미니즘과 대중문화의 관계성 변화일 것이다. 현재의 대중문화 변화 요인을 전부 페미니즘으로 보거나, 2015년을 기점으로 대중문화가 완벽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관심 밖에 머물렀던 여성의 모습과 서사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더 많이 드러나며, 남성성 및 가족상의 변화와 함께 젠더 배치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문학 연구자 오혜진은 2015년 메갈리아의 출현,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폭로, 2018년 미투 운동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문화를 생성하고 바라보는 “감수성의 혁명”을 가져왔다고 평했다(경향신문, 2019.05.03.). 그에 따르면 새로운 주체로 등장한 2030 여성에게 기존의 남성 중심 문학은 권위를 잃었으며, 대중문화 전반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여성 서사와 재현은 사회적으로 대중화되고 향상되는 젠더 감수성, 정치적으로 여성 대표성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과 연결된다(오혜진, 2019).
코로나 19로 대중문화 전반이 침체하기 직전인 2019년은 미디어 곳곳에서 눈에 띄는 작품을 만날 수 있는 해였다. 2016년 발간 이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고 사회적 열풍을 불러일으킨 『82년생 김지영』은 동명의 영화로 개봉하여 367만 명의 관객 수로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벌새>(김보라 연출), <우리집>(윤가은 연출), <메기>(이옥섭 연출) 등 여성 감독이 그리는 다양한 여성 서사는 평단과 대중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이 밖에도, 여성 청소년 서사를 섬세한 톤으로 표현한 <미성년>, 주로 남성으로 그려지던 ‘버디 무비’를 여성 경찰 2인조가 여성폭력범죄를 소탕하는 전개로 풀어 화제가 되었던 <걸캅스>, 여성 캐릭터의 주체성과 독립성을 보여준 <엑시트> 등, 2019년 한국 영화의 한 축은 분명히 여성과 페미니즘이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스카이캐슬>,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이하 <검블유>), <동백꽃 필 무렵> 등의 작품이 다양한 여성 캐릭터와 서사를 선보였다. 이 작품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페미니즘이라고 단정할 순 없으나, 서사를 끌고 가는 힘을 여성 캐릭터에게 주며 인상 깊은 여성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검블유>나 <동백꽃 필 무렵>의 경우, 전혀 다른 초점으로 다른 여성들을 재현하면서도 그간 로맨스물이 흔히 취한 남녀의 전통적 관계성을 전복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두 드라마 모두 여성 캐릭터들 간 관계가 주목을 받은 점 역시 흥미로운데, 주연 여성들 간 밀도 높은 관계성에 공을 들인 <검블유>는 퀴어베이팅(queerbating, 퀴어를 재현하지 않으면서 퀴어를 재현하는 듯한 암시를 주거나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 자세한 설명은 여기를 참조.) 성공 사례로 봐도 될 정도이다.
이듬해인 2020년, 영화산업은 코로나 19에 직격타를 맞았다. 그럼에도 위와 같은 흐름을 잇는 영화들이 있었는데, <찬실이는 복도 많지>(김초희 연출), <야구소녀>(최윤태 연출), <프랑스여자>(김희정 연출), <69세>(임선애 연출) 등이 그 예다. 특히 노인 여성의 성폭력 피해 문제를 다룬 <69세>는 21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에서 감독상과 연기상을 모두 거머쥐었다. 드라마 부문에서는 넷플릭스, 왓챠 등 OTT 플랫폼 확장에 힘입으며 국내 작품의 실험성도 높아졌는데, 정세랑 작가의 원작을 재해석한 <보건교사 안은영>(이경미 연출)이 넷플릭스에서 방영되며 이슈 된 바 있다.
2019년은 근 몇 년 간 <프로듀스 101> 시리즈의 흥행 등을 통해 성상품화와 여성혐오가 여전히 '잘 먹히는' 소스임을 확인하던 아이돌 엔터테인먼트에서 <퀸덤>이란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 나온 해이기도 하다. 걸그룹 간 경쟁 구도 안에서 출연자들은 ‘내가 하고 싶었던 무대를 보여줄 기회’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고, 몇몇 그룹은 무대를 통해 '퀴어한' 섹슈얼리티를 보여주거나 여성의 힘과 야망을 노래했다. 남성과 이성애 중심의 섹슈얼리티가 지배적이었던 걸그룹 무대에서 소수나마 이런 퍼포먼스가 나온 점은 변화의 조짐을 보여주기 충분했다. 그리고 2020년, 변화는 동일 방송사에서 진행한 <굿걸>을 통해 확장된다. <굿걸>은 그간 쭉 고수해 온 경쟁 구도를 벗어나 여성 래퍼와 R&B 가수들이 매회 협업을 통해 무대를 꾸린다는 기획으로 진행되었는데, 두드러지는 점은 페미니스트 래퍼 슬릭의 출연이었다. 그는 짧은 머리에 안경을 끼고 시종일관 편한 옷과 각종 페미니즘 굿즈를 걸친 채 방송에 임했으며, 첫 무대에서 무지개 깃발을 배경으로 페미니스트와 성소수자를 위한 노래 <Here>을 선보였다. 이 노래는 논바이너리, 간성(Intersexual), 무성애자(Asexual)와 같이 퀴어 안에서도 소수로 분류되는 정체성과 성별, 섹슈얼리티를 가시화한 가사로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감동을 주었다고 회자된다.
Got rainbow on ma wrist
Bread and Roses for ma women
For ma all gender queer
For ma all spectrum 위의 가능성들을 위해
For ma non-binary와 AIQ들을 위해
- 슬릭, <Here> 가사 중
이어지는 2021년은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해였다. 여성 댄서들이 나와 대놓고 싸우는 이 예능은 여성들의 야망, 경쟁, 협동, 우정을 한 데 모아 보여주며 모두를 열광하게 했다. 마른 몸, 날씬한 몸, 근육질의 몸, 육감적인 몸, 통통한 몸, 직선적인 몸, 곡선적인 몸 등 다채로운 몸들이 춤을 통해 보여주는 생명력과 개성 강한 인물들은 그 자체로 획일화된 여성 재현 방식에 균열을 내었다. 치열한 경쟁과 승부욕, 순간을 불태우는 열정, 화끈한 싸움 등, 대부분 남성을 통해서 재현되던 모든 모습이 그 안에 있었다. <슬램덩크>와 같은 스포츠물의 경쟁 틀 안에서, '여자들의 기싸움'이 질투와 시기, 모략으로만 연결되던 납작함도 깨졌다. 그간 미디어가 잘 재현하지 않던 많은 여성들의 모습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셈이다.
이처럼 2019년부터 이어지는 미디어 전반의 변화는 대중문화의 주 소비층인 소위 ‘젊은 여성 세대’의 욕망을 반영한 결과이자 창작자 또는 출연자 여성들의 욕망과 지향이 반영된 결과이다. 특히 이해관계자가 많고 규모가 큰 만큼 변화의 속도가 더딘 대형 엔터테인먼트나 영화산업에서의 눈에 띄는 변화들은, 페미니즘 리부트의 영향이 대중문화 전반에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는 방증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편, 근 몇 년간 영화와 드라마에서 눈에 띈 흐름 중 하나는 원 소스 멀티 유즈 중에서도 웹툰의 활용이다. 웹툰 작가의 시초라 할 수 있는 강풀의 거의 모든 작품이 영화화된 것을 시작으로 영화 <이끼>, <은밀하게 위대하게>, <내부자들>, <0.0MHz>, <여중생 A>, <시동>, 천만 영화 반열에 든 <신과 함께> 시리즈와 가장 최근 개봉작인 <모럴센스>까지, 웹툰 원작 영화는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웹툰 원작 드라마 역시 2014년 <미생>의 흥행 이후 지금까지 90편이 넘게 제작되었다. 2010년부터 약 7년간 네이버에서 인기리에 연재된 <치즈 인 더 트랩>은 드라마화에 이어 영화화까지 진행되며 인기를 실감케 하기도 했다. <계룡선녀전>,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 <죽어도 좋아> 등, 페미니즘을 적극 ‘끼얹은’ 웹툰들이 드라마화된 사례도 있다.
이처럼 하나의 플랫폼이자 소스로 자리 잡은 웹툰은 시장인 동시에 변화가 빠른 미디어다. 이에 대해 구자준(2019)은 온라인 공간에 기반을 두어 즉각 구독/소비될 수 있는 강력한 접근성을 지닌 웹툰의 매체적 특성을 빠른 변화의 요인 중 하나로 언급했다. “온라인 공간의 하소연과 제도권 문학의 사이에서 성장한 웹툰의 특성은 기성 미디어에서는 다루기 어려웠던 현실의 문제를 자유로우면서도 핍진하게 그려낼 수 있도록 만든다(구자준, 2019)”는 그의 분석대로, 2015년 전후로 일명 빨간약을 먹은 작가들은 즉각 자신의 웹툰을 통해 목소리를 내거나, 연재 중인 작품에 자신의 깨달음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꼼꼼히 분석한 페미니즘 웹툰 비평서 『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에서 “페미니즘-참회록(탱알, 2019)”이라 일컬은 <덴마>(양영순, 2010~2019)는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미디어 변화의 흐름 중 하나로, 이 글은 2015년 이후 만들어진 웹툰 몇 작품을 통해 다양한 여성 및 섹슈얼리티의 재현과 재현의 의미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전에, 몇 가지 지점을 다음과 같이 짚고 넘어간다.
첫째로, 웹툰 속 여성 서사에 관하여 다양한 작품을 시의적절하게 분석해 의미화한 사례로는 언급한 『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가 있고, 웹툰 속 젠더 재현에 관한 연구도 여러 차례 선행되었다. 일례로 웹툰의 참여적 성격에 초점을 맞춘 공다해(2019)는 웹툰 <며느라기>를 분석하며, 여성의 시선으로 재현되는 한국사회의 젠더 불평등이 유사 사례를 폭로하는 수용자의 댓글을 통해 일종의 지식담론을 형성하고 “모종의 연대를 통해 사회에서 유지되었던 젠더 규범에 균열을 만들었(공다해, 2019)”다고 평했다. 그는 수용자의 젠더 담론 변혁 사례로 10대 청소년의 임신과 미혼모를 여성혐오적으로 다룬 웹툰 <틴맘> 퇴출 운동을 언급하기도 했다(공다해, 2019). 이 글에서는 여성 서사보다 협소하고 비교적 명확히 기준을 잡을 수 있는 여성 캐릭터의 재현, 특히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 재현 및 젠더 배치에 초점을 맞춘다. 이미지를 활용하는 웹툰은 그 자체로 섹슈얼리티와 몸의 재현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바탕을 두고 작품의 서사를 끌고 가는 주체로서의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을 살펴보려 하며, 웹툰의 참여적 성격이나 수용자의 반응에 대한 언급은 최소화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여성과 성소수자의 서사를 적극 조명하는 웹툰의 등장을 페미니즘 리부트의 흐름으로 볼 수는 있으나, 모든 웹툰을 이 흐름 안에서 보거나 페미니즘 웹툰으로 단순화 할 경우 놓치는 지점이 생길 수 있다(구자준, 2019). 2000년대 이후 여성과 성소수자의 시선이 바탕이 되는 웹툰은 꾸준히 나왔고, 2015년 전에 만들어져 페미니즘 리부트를 통해 “재발굴”되는 다양한 여성 서사나 관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구자준, 2019). 또한, 페미니즘 관점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것과 어떤 작품을 페미니즘 작품으로 분류해 단정짓는 것은 다르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웹툰은 대개 연재 중이거나 2015년 후에 창작되어 시기상 페미니즘 리부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으며, 이 글은 페미니즘 리부트가 내포하는 시대적 특성과 관점으로 작품을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여성 재현의 방식에 한정된다. 따라서, 그간 전면에 내세우기 힘들었던 여성 캐릭터들의 등장으로 여성 재현 범위가 확장된 현황을 다루고 의미화하는 것까지가 이 글이 말할 수 있는 범위일 것이다.
메갈리아의 등장과 강남역여성살해사건이 지금의 페미니즘 대중화를 촉발한 직접적 계기라면, 웹툰의 소비층이자 생산층의 한 축을 담당하는 2030 여성의 공통된 정서 중 하나는 폭력범죄를 통해 체감한 2등 시민이라는 감각과 주체성/주권의 훼손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김홍중(2015)의 '주권자의 우울' 개념과 이나영(2016)의 강남역여성살해사건 의미화 논의를 빌릴 수 있다. 김홍중(2015)은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참사가 국민 정서에 끼친 영향을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실감에서 비롯된 '주권자의 우울'로, 이나영(2016)은 강남역여성살해사건으로 촉발된 여성 시민의 다양한 역동을 “부당한 죽음에 대한 애도를 통해 삶의 정치화를 새롭게 구축하려는 시도(이나영, 2016)”로 해석했다. 10대 중후반 또는 20대 초중반에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부당한 죽음’과 이를 외면하는 국가를 목도한 2030 여성들은 강남역여성살해사건과 이후의 사회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 지점과 대중문화 속 여성 재현의 변화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생동감 있고 다면적인 여성 캐릭터가 증가하며 여성 재현의 방식은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변화에 주목하여 여성의 주체성을 논하고자 한다. 바트키(2003)는 푸코의 ‘유순한 몸’ 생산을 위한 훈육과 감시 개념을 빌어,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훈육이 정체성과 주체성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바 있다. 그는 “우리가 날마다 몸에 새겨 넣는 문화적 의미를 읽을 줄 알(바트키, 2003)”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역으로 가부장제의 훈육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몸의 시도들은 여성의 주체성 회복 과정이지 않을까? '웹툰 속 날뛰는 여자들'은 이 질문에서 출발했다. 다음 글에서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 중에서도 제일 날뛰는 여자들을 소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