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총선을 앞둔
버나딘 에바레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2019, 국내 출판 2020)을 읽고 있다. 흑인, 여자, 소녀, 엄마,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예술가, 직장인, 주부, 이민자, 가족, 공동체, 제도 따위가 열두 명의 생애를 따라 거미줄처럼 연결된다. 폭력과 상처와 상실과 연민과 사랑과 생의 의지가 촘촘히 내려앉은 거미줄이다. 주된 배경은 20세기 후반 영국이고 주인공은 흑인이지만 그 시절 영국만의 이야기도 흑인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한 사람의 삶에는 늘 특수성과 보편성이 얽혀 있음을 새삼스레 느낀다.
총선을 앞두고 개인의 삶, 특수성, 보편성과 정책을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할지, 생각이 많아진다. 하나의 삶에는 다양한 이름의 특수성과 보편성이 교차하고, 그 삶은 분절될 수 없다. 집단은 개인의 집합이다. 그렇다면 한 사회의 특수성과 보편성 역시 연결된다. 이때, 한 사회의 특수성을 포괄하지 못하는 보편이 가능한가? 특수성 때문에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다 누리지 못한다면, 누리기 위해 사회가 지정한 보편의 범주에 들고자 애써야 한다면, 그걸 보편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적어도 정책이 지향할 보편은 아니지 않을까?
이틀 전에 읽은 기사가 생각난다. 외국인 유학생과 결혼이민자 가족을 최저임금 미만 가사 노동자로 쓰자는 대통령의 제안이 실려 있었다. 주말엔 탈시설지원조례 폐지가 입법예고된 서울시의회 소식을 들었다. 지난 목요일엔 일부 시의원들이 노인 일자리 활성화를 위해 65세 이상 노인은 최저임금법 대상에서 제외하자고 건의했다는 기사를 봤다. 몇 주 전쯤엔 지하철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 건으로 검찰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는 사실을 접했다.
그 시위를 두고 ‘서울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은 부조리라던 정치인의 얼굴이 스쳐 간다. 사회적 합의를 빌미로 18년째 입법이 안 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여성이고 동성애자인 제 인권을 반으로 자를 수 있냐’던 어떤 이의 질문이 함께 떠오른다. 모든 방면에서 성평등 의제를 찾기 힘든 거대 양당의 2024년 총선 정책도 떠오른다. 두 정당의 정책에는 유엔 등 국제기구의 대표적 인권문제 개선 권고사항인 비동의강간죄 도입조차 찾을 수 없다.
누군가의 인권을 보호선 바깥에 두거나 삶을 쪼개어 부분만 인정하는 권력이 폭력인지 현실적 타협인지, 해결하기 어려운 정책의 딜레마일지, 나는 모른다. 그래도 이를 고민하지 않는 정당은 뽑지 않을 것 같다.
커버 이미지 버나딘 에바레스토(2019, 국내 출판 2020),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