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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운 유해함에 역겨움 더하기

코랄리 파르자(2024), 서브스턴스

by 한솔

기대 이하로 참신하고 기대 이상으로 역겹다. 젊은 몸과 늙은 몸이 시간을 나눠 갖는다는 발상은 보는 이의 기준에 따라 기발할 수 있겠으나, 설정의 정교함을 찾긴 어렵다. '일평생 여자에게 젊음과 미를 강요하고, 신체를 절단 내 품평하는 남성 중심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사회'라는 주제 의식은 선명하다 못해 노골적으로 영화의 모든 요소에 내리 꽂힌다. 그러나 영화는 이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다. 대신, 두 시간 넘도록 그 시선을 재연하느라 바쁘다. 그것도 여성의 몸을 부위별로 전시한 다음 끔찍하게 난자하는 방식으로.

끔찍함은 ‘바디 호러’라는 장르보다는 카메라의 집착 어린 시선에서 온다. 젊은 여자가 세상의 화려한 조명을 즐기는 대가로 점점 더 추해지는 늙은 여자의 몸 구석구석이 젊은 여자의 몸과 대조된다. 대조되는 젊은 여자의 몸은 시종일관 섹슈얼하게 소비된다. 그리고 이 여자의 몸은 이내 공포에 가까운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힌 늙은 여자에 의해 ‘상징적으로’ 분해되어 갈리고 내장이 뽑힌다. 여기서 상징이란, 늙은 여자가 젊은 여자의 에어로빅 TV 쇼를 보며 요리하는 과정과 요리 재료다. 종일 굶은 사람이 봐도 입맛을 뚝 떨어뜨릴 만큼 더럽게 묘사되는 요리 과정이 TV쇼 화면과 빠르게 교차된다. 섹스 은유인지 에어로빅인지 헷갈리는 동작을 바짝 클로즈업해 보여주는 TV 화면이 요리와 번갈아가며 나오는 편집은 요리 재료와 여자의 몸을 동일시하게 한다. 동일시의 정점은 오르가슴을 느끼는 양 움직이는 젊은 여자의 몸과 칠면조의 내장을 헤집는 장면이 교차되는 부분이다.


이런 식의 고어한 재연이 비판하고자 하는 시선의 추잡함과 끔찍함을 드러내는 장치라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영화가 '어떻게 더 징그럽게 재연할까'에만 골몰한다는 점과, 그 결과물을 보며 초 단위로 불쾌하고 괴로울 관객은 여성이라는 점이다. 늙은 여자의 몸과 젊은 여자의 몸을 조각내어 극단적으로 대비하고, 시종일관 성적인 구도로 젊은 여자의 몸을 찍으며, 그 몸을 요리 재료에 빗대어 난도질하는 카메라는 영화가 비판하려는 대상과 놀랍도록 닮았다. 그 시선 그대로 젊은 여자가 늙은 여자를 피떡이 되도록 패 죽이는 장면을 찍으며 감독은 관객이 뭘 느끼길 바랐을까? 젊고 아름다운 몸에 집착하다 괴물이 된 여자가 환호성을 기대하며 오른 무대에서 가슴 덩어리를 토할 때, 관객은 어떤 감상을 남겨야 할까? (영화는 이때, 극 초반 남자들의 품평 장면을 재생하며 가슴 덩어리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러나 역겨운 시선을 역겹게 재연하는 장면에서 대단한 의미를 찾긴 어렵다. 반복되는 일차원적 설명은 촌스러움만 남긴다.) 내장 덩어리가 되어서도 꾸물꾸물 기어가며 사랑받는 환상에 겨워하는 여자를 보며 관객은 뭘 느낄까? 한순간도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하다 청소차가 치우는 오물로 생을 마감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가 혀를 차는 대상은 결국 누구인가?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 아무도 없는 골목에 들어서자 울음이 터졌다. 141분 동안 갖가지 방식으로 여성의 몸을 능멸하기 바빴던 카메라가, 허상의 사랑을 갈망하며 망가져가는 주인공에게 1초도 다정하지 않았단 사실에 슬프고 화가 났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을 인격체로 그리지 않겠다고 작정한 영화의 감독이 여자란 사실은 거의 상처였다. 폭력의 잔상이 뇌에 남아 나를 계속 때리는 것 같았다.


비판 대상의 시선을 재연하는 데서 그치는 창작물은 폭력일 뿐이다. 감독이 여성이란 이유로, 지난 수십 년간 숱한 남성 감독들이 여성의 몸을 난자하던 시선을 그대로 가져온 영화에 페미니즘을 붙인다면, 이거야말로 블랙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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