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스타인, 거슈인 랩소디 인 블루

블루 빛 유혹, 파리의 백일몽

by Watragod

https://youtu.be/kNEi9e-AAOg?si=H-m2Kyf3jH9ufU0S

Gershwin Rhapsody In Blue, An American In Paris_Bernstein_1959.flac

아침에 스크린 골프 한 판으로 몸에 기분 좋은 피로감이 내려앉은 오후, 나른한 낮잠을 청하기 위해 턴테이블 위에 콜럼비아 2-Eyes(초반이 아니라서 아쉽지만) 판본의 거슈윈을 올린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고 직접 건반을 두드린 이 음반은, 바늘이 내려앉는 순간부터 거실의 공기를 1950년대 뉴욕과 파리의 어느 지점으로 순식간에 이동시킨다.

첫 곡 '랩소디 인 블루'가 시작되면 클라리넷의 매혹적인 글리산도가 공중으로 치솟고, 이내 번스타인의 끈적한 피아노 터치가 이어진다. 그 선율은 마치 스모그 자욱한 재즈 바에서 담배 한 모금을 머금은 채, 서로를 탐색하는 남녀의 은밀한 눈빛처럼 밀도 높게 다가온다. 왼쪽에서 들려오는 애절한 바이올린에 오른쪽 브라스가 화답하고, 중앙의 피아노가 이를 조율하는 완벽한 스테레오의 무대감은 마치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블루'라는 이름과는 달리, 이 곡은 우울하기보다 대도시의 에너지가 응축된 찬란한 축제에 가깝다. 짙고 검은 파란색의 정서 속에서 나른한 유혹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피로는 환상적인 백일몽으로 변한다.

음반을 뒤집어 '파리의 미국인'으로 넘어가면 분위기는 반전된다. 실내의 끈적함은 사라지고, 창문을 활짝 연 듯 50년대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눈부신 햇살이 쏟아진다. 낯선 타국에 도착한 '미국 촌놈'의 시선으로 바라본 파리는 소란스럽고 활기차다. 실제 택시 경적 소리가 섞인 오케스트레이션은 이방인의 설렘과 혼란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곡 중반, 다시금 랩소디 인 블루를 닮은 나른한 블루스 선율이 흐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스치기도 하지만, 거슈윈은 결코 그 우울함에 침잠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음악은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다시 긍정의 에너지를 몰아붙인다. 불안함이나 두려움 따위는 억지로라도 감추려는 듯, 강박적일 만큼 화려하고 위트 있게 몰고 가는 피날레는 거슈윈 특유의 낙관주의를 보여준다. 모든 악기가 쏟아지는 시끌벅적한 마무리 속에서, 서울의 빌딩 숲과 고궁의 정취를 떠올리며 이 이방인의 행진에 동참해 본다. 음악이 끝나고 바늘이 마지막 골을 도는 정적의 순간, 나른했던 몸에는 다시금 생생한 활기가 차오른다.

이 근사한 오후의 산책을 마무리하며, 다음번에는 더 날카롭고 생생한 브라스의 쾌감을 선사할 초판본을 구입해서 이 '긍정의 폭주'를 다시금 한번 직면해보고 싶다는 기분 좋은 욕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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