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nAWnKyjusKQ?si=LfjNlJSoL7s52Fj4
오늘은 오랫동안 아껴두었던 오이스트라흐와 오보린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LP를 올렸다. CD의 매끈함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투박하고 따스한 LP만의 질감이 방 안의 공기를 금세 데운다.
'크로이처' 1악장이 시작되자마자 숨이 멎는 듯한 긴장감이 찾아왔다. 바이올린 독주가 앞서가면 피아노가 집요하게 그 뒤를 쫓는다. 다가서면 멀어지려 하고, 얼르고 달래다 함께하는 듯싶더니 다시 밀쳐낸다. 이 연주는 단순히 합주가 아니다. 이건 '야한' 밀당이다. 바이올린은 도망치는 여자 같고, 피아노는 그를 달래며 꼬시려는 남자 같다. 서로의 간을 보듯 천천히 속삭이다가도 어느 순간 격렬하게 몰아치는 그 과정은, 연인이 아니었다가 연인이 되어가는 찰나의 절정 같다. 바이올린의 피치카토는 마치 가느다란 신음처럼 들리고, 피아노는 그 소리를 교묘하게 유도하며 끝까지 몰아붙인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는 서툰 청춘의 치기가 아니다. 어느 정도 중년을 향하는,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본 원숙한 두 사람의 농익은 대화다. 오이스트라흐의 바이올린은 신비할 정도로 여유롭다. 신경질적인 구석이라곤 전혀 없이, 부드럽고 풍성하게 상대를 안아준다. 그 곁에서 오보린의 피아노는 톡톡 터지는 타건으로 바이올린을 절묘하게 받쳐준다. 반주의 정석이란 이런 것일까. 왼쪽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의 고백과 가운데를 꽉 채운 피아노의 울림이 어우러져, 마치 서로를 위로하며 바라보는 연인의 눈빛을 보는 듯했다.
이어지는 '봄' 소나타는 분위기를 확 바꾼다. 피아노가 '쿵' 하고 문을 열면, 밝고 경쾌한 봄날의 아침이 펼쳐진다. 1악장의 산책은 싱그럽고, 2악장의 나른함은 한낮의 꽃향기를 머금고 있다. 서로 손을 맞잡고 톡톡 터트리는 듯한 연주는 사랑스러움 그 자체다. 아련한 그리움을 회상하던 3악장을 지나, 양념치듯 튀어 오르는 4악장의 시작은 다시 나를 생의 활기로 이끈다.
'중년의 명랑함'. 오늘 이 앨범을 관통하는 한 마디다. 삶의 무게를 아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이 여유로운 미소. 폭풍 같은 정사와 나른한 휴식, 그리고 아련한 회상까지... 한 편의 드라마를 다 본 기분이다.
내일은 이 기운을 이어받아 로스트로포비치의 묵직한 브람스를 꺼내 들어야겠다. 오늘의 이 따뜻한 여운이 밤새 LP의 소리골처럼 내 마음속에 깊게 새겨져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