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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은 틀리고 천국은 맞다. 마틴 루터.

죽음의 철학 part1. 마흔에 다시 본 마틴 루터.

by Lisa

세계사 교과서는 불친절했다.

마틴 루터 종교개혁 끝.

그래서 종교개혁이 나쁘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엄마 마틴 루터는 어떤 사람이에요?”


고딩이었던 나의 물음에 성당 구역장이었던 엄마는 명쾌한 답을 주셨다.


“나쁜 놈이야 나쁜 놈.”


엄마는 성당 구역장이기 이전에 항상 진보보다는 보수 쪽에 서는 사람이다.

아직까지도 엄마는 송금을 하러 은행에 가는 사람이고, 양말은 무조건 세탁기보다는 손빨래를, 인덕션보다는 가스레인지를 쓰는 사람이다. 매일 가던 길로만 가는 사람이고, 이 쪽 길로 가면 뭐가 나올까 절대로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이다.

어찌 되었건 엄마와의 대화 뒤로 나는 단 한 번도 루터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25년 가까이 루터는 내게 그냥 나쁜 놈이었다.

그런데 마흔에 루터에 대해 알아가게 될 줄이야..


루터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중세시대의 교회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중세시대의 평균 수명은 기껏해야 마흔 정도였다.

나는 이미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이라는 말씀.

농민으로 태어났다면. 결혼해서 밭일하다 애 낳고 밭일하다 애 낳기를 반복했겠지. 애좀 키우다 살만하면 죽음이 코앞에 와있었을 것이다

그뿐이랴, 전쟁과 기근, 높은 영아 사망률(60%)로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었을 터.

인생 자체가 지옥이거늘 죽으면 사후 세계가 반드시 있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예수 믿고 열심히 살아봐야 성인으로 순교한 것이 아닌 평민들의 인생은 다 거기서 거기였을텐데.

지옥은 일단 거르더라도 거짓말도 가끔 하고 스리슬쩍 죄도 저지르는 것이 사람의 인생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천국에 가기엔 양심이 찔린다. 이런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연옥 되시겠다.


연옥에서 인간은 정화과정을 거친다.

살아있는 동안 지은 죄를 씻고 천국으로 가기 위해 일시적으로 머무는 장소인데, 보아하니 그 고통이 지옥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아 보인다. 그리하여 중세의 카톨릭은 연옥에 빠진 영혼을 연옥에서 구해주는 면죄부라는 획기적인 아이템을 판매한다. 뿐만 아니라 죽은 이를 위한 위령미사. 중보기도(타인을 위한 기도). 성지 순례 등 여러 잇 아이템들을 판매한다.

계단 모양의 중간이 연옥이다. (단테의 신곡)
교회에서 팔던 면죄부. 송아지 3마리 가격이었다고 한다.

그때의 교회에서의 구원은 돈이었다.


돈의 구원에 반기를 든 인물이 바로 마틴 루터이다.

그는 예수천국 불신 지옥의 선봉에 선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으면 일단 지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연옥 역시 부정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모두 천국행 열차에 탑승했으니 사후 세상은 걱정을 하덜덜 말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죽은 다음 바로 천국에 가냐고?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죽으면 잠에 빠지며 한 명씩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때가 되면 영혼과 육신은 모두 부활하며 그것은 공개적인 장관이 될 것이란다. 그날이 되면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무덤을 박차고 나오는 것이다. 죽은 조상님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라는 표현을 종종 쓰곤 하는데 딱 그때 가장 적절히 쓸 수 있을 듯하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어찌 되었건 평민들 입장에선 돈을 내면 구원해준다는 말보다는 믿으면 구원해준다는 쪽이 더 마음이 갈 법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도 늘어나는 각종 세금에 숨이 턱턱 막히는데. 왕에게. 영주에게 그리고 교회에 까지 세금을 내며 현세를 살아가기도 벅찬 중세의 농민들에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내세의 삶을 위해서 면죄부까지 판매하다니 참으로 가혹하다. 벼룩의 간까지 알차게 쪽쪽 빨아 드신다.

그리하여 루터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말하며 너희에게 그리스도라는 든든한 빽이 있는데 무엇이 걱정인가!라고 설파한다.

그러나 역사의 많은 걸출한 인물들처럼 그에게도 한계가 있었으니, 정치와 결합한 로마 가톨릭에 반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역시 지배세력과 결탁하여 농민전쟁에서 영주의 편을 들었다. 이는 마틴 루터의 한계점으로 지적받고 있다.

마르틴 루터는 농민전쟁을 두고 , 1525년 5월 이렇게 말한다.

"반란보다 더 사악하고… 유독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교회의 부정 부패에 반기를 들고

라틴어로 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개혁의 아이콘인 그가 농민들의 그것은 반란이라 말하다니.

중세 봉건주의 성직자의 한계일까? 아니면 개혁가에 대한 지나친 낭만인가..

평생을 카톨릭 신자로 살던 나에게도 짜릿한 개혁이었건만..

참으로 아쉬운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참고

영화 마틴 루터

기독교 신학의 죽음 이해

단테 신곡

네이버 시사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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