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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Jan 02. 2022

《바이킹을 탈 수 있나이다》

1.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핵 주먹으로 유명한 마이크 타이슨이 남긴 말이다. 결혼 전에는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가족을 꿈꿨다. 결혼해서 세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말이다. 둘째 때까지는 그나마 어느 정도 컨트롤이 되는 듯 싶었다. 하지만 셋째가 럭비공처럼 여기저기 휩쓸고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제야 마이크 타이슨의 말이 나 들으라고 하는 말처럼 들렸다.

서울에 살 때, 세 아들을 데리고 서울 근교의 놀이동산에 간 적이 있었다. 비좁은 차에 다섯 식구와 몇 가지 짐을 챙겨서 싣고 나, 출발하기 전임에도 체력은 이미 1/3이 소모되어 버렸다. 놀이동산에 도착하자 직립 보행이 가능했던 첫째와 둘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뛰어다녔다. 유난히 에너지가 넘치고 호기심이 많던 첫째는 놀이기구를 타는 것마다 시시하다면서, 다른 재미있는 놀이기구는 없냐며 아쉬움을 늘어놓았다. 그때 첫째는 7살이었는데, 바이킹을 타이기에는 너무 이른 감이 있어서 이 정도만 타면 좋겠다고 타일렀다. 그러자 첫째는 바이킹을 타면 신날 것 같다며, 그때부터 계속 '바이킹~!'을 연호하면서 꼭 타고 싶다고 떼를 썼다. 하는 수 없이 첫째에게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라고 다짐을 받고 함께 바이킹을 탔다.

이내 바이킹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최고 정점을 찍으며 좌우를 오갔다. 첫째가 기겁을 하더니 '아빠. 무서워! 그냥 내릴래요!'하고 절규하듯 외쳤다. 이미 때는 늦었다는 걸 알려주고는 첫째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바이킹이 멈추고 나자 첫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따졌다. "이렇게 무서운지 몰랐잖아요! 아빠 때문에 십년감수했잖아요!" 일곱 살짜리가 십년감수했다는 말에 짠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2.
예수님께서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예고하자, 야고보와 요한이 선수를 친다. '주님. 영광중에서 저희를 좌우편에 앉게 해 주세요!' 이에 예수님은 너희가 그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고 되물으셨다. 이 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던 형제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네. 당연히 그 잔을 마실 수 있죠!'라고 대답한다. 만약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잔이, 축배와 영광의 잔이 아닌 고난의 잔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결국 야고보는 사도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를 당한다. 동생 요한은 다른 사도들처럼 죽어서 순교하지 못하고 혼자만 살아서 순교한다.

멋모르면 용감하다고 했다. 여기에는 장단점이 있다. 멋모르면 눈치를 보거나 체면을 차리지 않고 도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멋모르면 잘못 구해서 패가망신할 수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형제의 당돌한 요구를 담대한 믿음이라고, 이런 태도로 구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믿음이라고 배웠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잔을 마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호기로운 다짐이나 결단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결의와 결단은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도망치는 것으로 끝났다. 우리가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좌우편 자리에 앉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

3.
영적으로 어릴 땐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아무거나 막 구하기 쉽다. 모든 사람이 처음에는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기도를 배우고 익힌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장하면 무엇을 구해야 할지 무엇을 구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감각이 생긴다. 구하는 것을 보면 구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야구나 축구 선수들이 공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매일 시도 때도 없이 공을 손이나 발에서 놓지 않고 가지고 노는 것이다. 공을 자주 만지면서 주고받을 때 손과 발에 감각이 생긴다. 그것처럼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가까이할 때, 그제야 말씀에 대한 감각이 생긴다. 이렇게 형성된 말씀에 대한 감각이 기도에 대한 감각을 낳는다.

첫째 아들이 거듭된 경고에도 '바이킹을 탈 수 있나이다!'라고 한 것을 떠올려 본다.' 동시에 누군가 '무엇을 구할지 조심하라. 왜냐하면 실제로 응답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도 함께 곱씹어 본다. 기도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거나 부담을 갖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지만, 불도저식의 기도를 믿음의 기도라고 찬양하는 것도 썩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기도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싶다. 그렇다고 만만하게 보고 싶지도 않다. 다만, 말씀을 가까이하면서 좀 더 기도의 감각을 얻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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