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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Dec 28. 2021

《헤아림, 배려의 농도》

1.

언어에도 온도가 있다고 하던데, 실제로 듣기만 해도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말들이 있다. 사랑, 공감, 경청 같은 말들은 그 자체로 따뜻하다. 배려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배려만큼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말도 없다. 배려를 통해 따뜻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건, 나를 헤아려 주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일 것이다. 이런 까닭에 헤아림은 배려의 길라잡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각자도생의 시대라 자기 혼자 살기에도 빠듯한 듯하다. 여전히 배려를 기대하고 요구하는 사람은 많지만, 먼저 다가가 배려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사는 일이 메마르고 퍽퍽할수록 누군가를 헤아리는 일은 관계에 있어서 윤활유 역할을 한다. 헤아리는 대로 헤아림을 받는다고 했다. 배려도 제대로 받아본 사람이 제대로 배려할 수 있다. 때문에 누군가의 배려로 감동을 받았다면, 그가 나를 배려한 과정을 떠올려 보면 좋다. 그러면 다른 누군가를 배려할 때 좀 더 헤아림을 반영할 수 있다.


2.

아직도 기억에 남는 배려의 추억이 하나 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부임한 교회에서의 사역은 하나부터 열까지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사역은 피로 누적의 법칙에 따라 늘 버거웠다. 한번은 열대야까지 기승을 부리던 한여름 새벽이었다. 그날은 새벽기도 시간에 말씀을 전하는 날이었는데, 예배당은 이마와 등 뒤로 땀이 흐르는 게 느껴질 정도로 후덥지근한 공기로 가득했다. 여기에 긴장이 땀구멍까지 전부 열어놓은 바람에, 연신 흐르는 땀을 훔쳐내기에 바빴다. 이윽고 시간이 되어 강단에 올랐다.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목부터 축이려고 컵을 들었는데, 손끝으로 느껴진 건 냉수의 차가운 기운이 아닌 뜻밖의 온기였다. 예상이 빗나간 탓에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순간 며칠 전, 지나가는 말로 ‘저는 새벽에는 목에 부담이 있어서 미지근한 물을 선호하는 편입니다.’라고 얘기했던 일이 떠올랐다. 새벽에 물을 올려놓으시는 분이 그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마음에 담아놓았던 모양이다. 비록 더위 때문에 흘리는 땀과 긴장 때문에 흘리는 식은땀으로 옷이 다 젖을 정도였지만, 마음만큼은 한여름에 시원한 냉수를 들이켠 기분이었다. 배려가 배려를 낳는다고, 그때 헤아림이 반영된 사소한 배려가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배울 수 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어느 새벽기도 시간이었다. 그날도 새벽기도 시간에 말씀을 전하려고 강단에 올랐다. 시작하기에 앞서 물을 마시는데 그냥 생수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녹차 티백을 우려낸 차였다. 이 새벽에 녹차를 올려놓으려고 더 수고하셨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감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난감하고 불편했다. 녹차에 들어있는 카페인 성분이 목마름을 더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목이 덜 풀린 상태로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녹차를 마시니 목에 더 부담이 되었다. 그런데 왜 하필 녹차를 올려놓으셨을까? 모르긴 몰라도, 본인이 평소 즐겨 마시는 차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좀 더 수고가 들어간 배려였지만 배려할수록 내 입장만 더 난처하고 곤란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진심이라고 다 배려로 느껴지는 건 아니다. 헤아림이 담겨야 한다. 진심이 배려의 시작일 순 있지만 결국에는 헤아림이 배려의 농도를 좌우한다.


3.

종종 나 혼자 배려하고 나 혼자 괜히 서운할 때가 있었다. 배려를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쯤으로 생각한 사람들 때문에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중에는 나의 일방적인 ‘다짜고짜, 무턱대고’ 식의 배려가 원인이었던 적도 있었다. 헤아리는 일을 건너뛴 배려는 서로 불편하다. 한쪽은 배려한다고 했는데 그걸 몰라줘서 서운하고, 다른 한쪽은 불필요한 배려 때문에 당혹스럽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 ‘다짜고짜, 무턱대고’ 식으로 주시면 그것처럼 난처하고 불편한 일도 없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충분히 헤아려서 그 필요에 맞게 채워주신다. 출애굽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운 대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추운 밤에는 불기둥으로 각각 인도해 주신 것만 봐도 그렇다. (결코 더운 대낮에 불기둥으로, 추운 밤에 구름 기둥으로 인도해 주지 않으셨다!) 사소하더라도 헤아림이 반영된 배려가 큰 감동을 준다. 배려에도 지혜가 필요하다.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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