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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Jun 13. 2022

사람의 뒤로 스토리가 풍경처럼 깔리면

1. 주인공 몰빵주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단번에 누가 주인공인지 알 수 있다. 화면에 자주 등장한다면, 대사량이 압도적으로 많다면, 어느 한 사람의 스토리를 비중 있게 다룬다면 바로 그 사람이 주인공일 확률이 99.99%다. 2시간 남짓한 내용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주인공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한때 드라마도 천편일률적으로 주인공이 모든 분량을 독차지한 적이 있었다. 지금껏 드라마는 주인공의 역사로, 주인공의 말만  살아남았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를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건 ‘주인공 몰빵주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조연들도 의미 있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연보다 더 주목받는 조연들이 쏟아지고 있다. 조연들에게 분량이 돌아가면 주연의 분량이 그만큼 준다. 자칫 주연의 존재감이 흐릿해질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조연들의 존재감은 주연의 존재감을 깎아 먹기보다는 도리어 부각해 줄 때가 더 많다. 좋은 드라마일수록 그렇게 만든다. 반면 별로인 드라마일수록 조연들의 존재감을 깎아서 주연의 존재감을 위한 땔감으로 사용한다.

그동안 인상 깊게 봤던 ‘미생, 나의 아저씨, 응답하라 시리즈, 나의 해방일지’ 등등은 기존의 1~2명의 남녀 주인공에만 의존하던 패턴에서 벗어나 등장하는 조연들의 이야기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여전히 주연보다 분량은 적지만, 그래도 조연들의 이야기와 배경도 의미 있게 다루어 준다는 점에서 내심 반가웠다. 우리의 삶은 주연보다 조연에 더 가까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시도가 다양한 시선을 배우는 좋은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다. 패자는 말이 없다. 오직 발언권은 승자에게만 주어진다. 그래서 역사는 그것이 맞든 틀리든 승자의 편에 서서, 좀 더 관대하고 친절하다. 간증도 성공한 사람의 소감인 경우가 많아서, 끝내 실패한 사람으로 남은 사람에게는 발언권조차 주지 않는다.

2. 네 인생처럼 내 인생도 소중하거든

주연을 맡은 주인공의 심정과 형편만 소중할 순 없다.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의 심정과 형편도 똑같이 중요하다. 그래서일까? ‘주인공 몰빵주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선을 제공하는 드라마에서는 왠지 사람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다. 주인공에게만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면, 조연들은 전부 가해자요 성가신 존재로 비치게 된다. 왜 저렇게 주인공을 못 잡아먹어서 난리일까 하고 은연중 생각하는 것이다. 주인공 시점에만 초점을 맞추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시선도 협소하고 왜곡될 소지가 있다. 주인공에 나 자신을 이입하면서 보기 때문에 '왜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까?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나는 당연히 이해받을 필요가 있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러나 조연들이 살아가는 자리와 현장 그리고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 다르게 보인다. ‘아! 조연들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구나!’ 그러면 무조건 주인공만 두둔하지 않고 좀 더 객관적이고 균형적인 시야로 바라볼 수 있다. 알면 다르게 보인다. 사람도 그렇다. 모르면 아무개로 끝나지만, 알면 누군가의 아들딸이나 누군가의 아빠와 엄마로 보인다. 사람의 뒤로 스토리가 풍경처럼 깔리면 달리 보인다. ‘그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구나, 그도 나처럼 똑같이 힘들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3. 누구에게나 스토리라는 풍경이 있다

성경을 읽을 때도 우리는 주된 인물에만 국한해서 말씀을 읽는다. 야곱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뿐, 에서의 입장에서는 바라보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 입장에서만 바라볼 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입장에서는 바라보지 않는다. 피해자 입장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가해자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쏠린 시선은 ‘누군가에게 나도 피해를 줬구나!’하는 생각 대신에, ‘피해만 봤구나!’하는 생각만 강화한다. 다양한 시선으로 말씀을 읽으면, 좀 더 풍성하게 묵상할 수 있는데 말이다.

학창 시절, 남들 다 다니는 학원 한번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다. 교육적으로 재정을 거의 지원받지 못했다. 왜 우리 집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억울했고, 그런 억울함은 부모님을 향한 아쉬움과 실망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예수님을 믿고 부모님이 살아오신 삶의 자리에 서서 바라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지금까지 살아오신 것 자체가 쉽지 않았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서, 부모님도 피해자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시선이 부모님의 시선으로 옮겨가자, 부모님이 다르게 보였다. 부모님도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고된 삶을 꾸역꾸역 살아오셨구나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주인공에게만 멋지고 아름다운 혹은 슬픈 스토리가 있는 건 아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조연들에게도 매력적이고 매혹적인 스토리, 사람 냄새나는 스토리가 많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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