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판사에 투고하고 회신을 기다릴 때였다. 몇 주 기다린 끝에, 속속 회신이 도착했다. ‘내용은 좋지만, 우리 출판사와는 맞지 않아 출판은 어렵겠습니다.’ 순진하게도 ‘내용은 좋았지만’이란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몇 번 퇴짜를 맞고 나서 알았다. ‘내용은 좋았지만’의 본뜻이, ‘아직 출판하기에는 모자란 구석이 많습니다.’라는 걸. 거듭된 퇴짜로 인해, 내 글에 대한 자신감도 곤두박질쳤다. 글을 쓰기엔 글러 먹었다고, 나 스스로 깎아내렸다.
2. ‘역시 내 글솜씨로는 무리인 걸까?’ 이런 자괴감이 들 때쯤, 출판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불리한 조건이었다. ‘이렇게까지 출판하는 게 맞을까? 내 실력으론 이렇게밖엔 안 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에 한숨만 나왔다. 그때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백승수 단장이 한 말이 가슴에 와 박혔다. “자기도 모르는 자기 가치를 우리가 왜 인정해줍니까?” 이 한마디가 혼미한 나를 흔들어 깨웠다. 정말 나도 내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 남들이 인정해주기만을 기대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3. 자기를 고평가하는 것도 별로지만, 뭔가를 해 보기도 전에 저평가하는 건 더 별로다. 딱 내가 그랬다. 주변에서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라고 할 때조차, ‘에이, 내가 무슨...’이라는 말로 나를 부정했다. 나도 나를 믿지 못해서, 번번이 나의 가치를 얕봤던 것이다. 지나온 삶의 궤적을 보면, 늘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다. 그래서 백승수 단장의 말이, 마치 ‘정신 차려. 왜 넌 항상 안 될 거라고만 생각해?’라고 외치는 것처럼 들렸다.
4. 이대로 내 금쪽같은 원고를 도매금으로 넘기고 싶지 않았다. 다시 백의종군하는 심정으로, 내 글을 다시 살펴보면서, 다듬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왜 그동안 투고에 실패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훌륭한 원고였지만, 다시 보니 설익은 원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봐도 책으로 나오기엔 무리였다. 아마 그때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다면, 처참한 실패를 맛봤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다 때가 있나 보다. 그때를 모르니까 계속 두드리는 것이겠지.
5. 이따금 둘째 아들에게서 내 모습을 목격한다. “난 못한단 말이에요!” 아빠가 보기엔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녀석은 곧잘 부정적으로 반응하기 일쑤다. (이와는 반대로 첫째와 셋째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하다) 평소처럼 하면 될 텐데, 해 보기도 전에 못 하겠다고 하니 답답했다. 그런데 그게 지난날 내 모습이었다. 하나님께서도 나를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안타깝고 안쓰러웠을까!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잠재력이 가장 많이 묻힌 곳이 무덤이라고. 분명 거기에 하나님께서 사용하라고 주신 달란트도 가장 많이 묻혀있겠지.
6.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나의 가치를 스스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지 않는 사람이다.’ 김완석 작가가 <위로가 되더라 남에게 건넸던 말을 나에게 건네면>이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김완석 작가는 희귀성 난치병을 앓고 있으면서,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젊은 작가다. 그는 입주민들이 함부로 막 대하는 경비원으로 일하면서도,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잃지 않았다. 그의 책을 보니, 틈틈이 글을 쓰면서 마음과 생각을 지켜낸 것 같았다. 그가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고, 많은 이들이 위로받을 수 있었다.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글쓰기가 망설여지는 이들에게, 스스로 자신을 얕보는 이들에게, 그리고 종종 망설여지는 나에게도 꼭 이 말을 건네고 싶다. ‘Why n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