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순간은, 아마도 격하게 공감이 가는 문장을 만났을 때가 아닐까 싶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누군가를 만나는 일만큼, 이해받는 순간이 또 있을까? 아무래도 홀로 가는 길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주위에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나마 덜 외로운 법이다.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받지 않고 이해받는 데도 유리하다. 그래서 다수가 아닌 소수로 살아가는 일은 늘 버겁다.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서 한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간혹 넌지시 알릴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왜 그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느냐? 잠도 부족한 마당에 새벽부터 무슨 글쓰기냐?”라는 반응이 뒤따랐다. 한심하다는 반응은 글쓰기에 의심을 품게 했다. 그때마다 “여기에서 포기할까?”라는 마음이 밀물과 썰물처럼 오갔다. 그러나 지금은 용케도 그 순간을 잘 넘겼구나 싶다. 종종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가 닿아 위로와 격려, 돌봄과 돌아봄을 제공해 주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의 저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습니다!”라는 반응은, 글쓰기에 더할 나위 없는 연료가 되어주었다. 만약 그때 손 털고 글쓰기를 포기했다면, 지금의 나는 더 괜찮은 삶을 살고 있었을까? 이 질문을 연거푸 100번이나 받는다고 해도, 내 대답은 한결같이 ‘아니오!’ 일 듯하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생각으로, 뭔가를 꾸준히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든든함을 준다. 물론 같은 생각을 만나면 반갑지만, 한편으로는 내 생각이 강화되는 확증 편향의 우려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나와 다른 생각의 글들을 많이 접하면서 사고의 확장과 전환을 모색하라고 하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구상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그러던 차에 김유진 변호사의 <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된다>를 읽는데, 얼굴에 미소를 번지게 하는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사실 나에게 새벽은 극한으로 치닫는 시간이 아니라 잠시 충전하는 휴식 시간이다.” 일전에 가까운 동료가 새벽과 아침에 글쓰기 하는 나를 보며 우려를 표한 적이 있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그런데 그건 모르는 소리다. 내게 새벽에 글 쓰는 시간은 소진되는 시간이 아니라 내 영혼이 소성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텅 빈 내 영혼의 곡간을 다시 채우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하루를 좀 더 튼실하게 살아낼 수 있었다. 김유진 변호사도 영혼이 집 나가려고 할 때쯤, 우연히 새벽에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충전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대인 관계도 좋아졌고, 일에도 능률이 올랐다고 한다.
“한가하게 글쓰기 할 시간이 없어요!” 글쓰기를 권할 때마다,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말이다. 맞다. 우리는 바빠도 너무 바쁘다. 직장에서는 일로 바쁘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늦은 밤까지 영화나 드라마를 보느라 바쁘다. 그것도 아니면 각종 모임에 참석하느라 하루 24시간도 부족한 삶을 살아간다. 이런 패턴이 일상이 되면 도무지 나를 위한 시간을 마련할 수 없다. 피로와 피곤이 복리 이자처럼 붙을 뿐이다. 사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 늦은 밤까지 할 일 없이 뭔가를 하다가 잠드는 게, 우리를 더 피곤하게 만든다. 누군가 왜 하필 새벽이냐고 묻는다면, 홀로 사유하고 뭔가에 집중하고 몰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누구도 틈입하지 않는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새벽은 긁지 않은 복권 같은 시간이기도 하다. 누구는 밤에 역사가 많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적어도 내게는 새벽이 그런 시간이다. 비록 매일은 아니더라도, 새벽에 글쓰기를 하면서 열심히 나를 긁어 보고 싶다. 뭐가 나올지 궁금해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