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다. 며칠 전이 그랬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갑자기 내 이름이 몇몇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사실관계를 잘 알지도 못하는 몇몇 사람이 한두 마디 얹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별일이 되었다. 내가 없는 곳에서 ‘~카더라!’라고 하자, 그 자리에 있던 동료가 적극적으로 내 편을 들었다고 한다. “제가 아는 그분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사무실에서 날마다 보는데, 제가 그분을 왜 모르겠습니까? 제가 혹 그럴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그분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 동료에게 딱히 잘해준 게 없는데, 나중에 내 편을 들어주었다는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그러고 보면, 내 편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내 앞에서만 아니라, 내가 없는 곳에도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로 진짜 내 편이다. 사실이 알려지자, 근거 없는 소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다. 후에 내 편을 들어준 동료에게 고맙다고 했더니, 이런 말을 해 주었다. “평소에 늘 보는데, 제가 그걸 왜 모르겠어요!” 잠깐 마음고생했지만, 이를 통해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사람들은 평소의 나를 보면서 나란 사람을 기억하는구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평소에 동료들에게 잘해야겠구나 싶었다.
이런 일을 경험하고 나자,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주장 손흥민 선수와 이강인 선수의 다툼이 다시 생각났다. 둘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사건의 전말이 채 밝혀지기도 전에 온갖 추측성 기사와 소문이 쏟아졌다. 뉴스와 온라인에는 실시간으로 이강인 선수를 비난하는 글과 영상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아시안컵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는데도 말이다. 신기한 건, 손흥민 선수를 향한 비난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어느 한쪽이 100% 잘못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손흥민 선수를 비난하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그 이유가 ‘평소’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문제가 불거지자, 유튜브에는 과거 이강인 선수에 대한 인터뷰와 영상이 재조명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강인 선수가 평소 선배들에게 선을 넘는 장난을 많이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와 관련된 영상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러자 사실관계가 밝혀지기도 전임에도, 이강인 선수는 이미 대역 죄인이 되어 있었다.
이와는 다르게 여론과 팬들은 손흥민 편을 들어주었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말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랬을까? 손흥민 선수는 그동안 수많은 동료와 팬들로부터 ‘좋은 태도와 인성’으로 칭찬이 자자했다. 그를 지도했던 감독들도 하나같이 그의 됨됨이를 칭찬했다. ‘평소’ 그의 모습을 잘 관찰한 끝에 내놓은 평가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그에 대한 증언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걸, 시합에서 어떻게 플레이하는지를 통해 목격하고 있다. 이런 손흥민 선수가 있기까지, 그의 아버지 손웅정 씨의 교육 철학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피땀 눈물을 흘려가며 밤낮으로 훈련한 이유가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다니 말이다. 우리는 아직도 손흥민 선수와 이강인 선수, 둘 중의 누가 더 잘못했는지 모른다. 단순히 우발적이었는지, 아니면 그동안 켜켜이 쌓였던 감정이 순간적으로 폭발한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거다. 잘 모를 때, 사람들은 ‘평소’를 통해 짐작하기 쉽다는 것을. 하루하루 잘 살아낸 ‘평소’가 쌓이면, 결국 내 편이 되어준다는 걸 마음에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