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우리는 화를 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화를 낼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잔인해질 권리까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빛나는 순간 / 파울로 고엘료-
과연 이 세상에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화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고 보니, 화(火)와 사람(人)이 닮았다. 어쩌면 사람(人)이 뿔난 상태가 화(火)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성적인 사람도 참을 수 없을 땐 폭발한다. 화를 내는 건, 기질과 성향과 무관하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느 땐 얌전한 사람이 더 무섭게 화를 낸다. 아무래도 그동안 꾹 참아왔던 분노를 일시에 터뜨리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보통 화를 대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화를 밖으로 투척해서 터뜨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끌어안고 속에서 터뜨리는 것이다. 대개 밖으로 끄집어내서 화를 내는 사람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나 뒤 끝없는 거 알지?” 이렇게 화를 말로 투척하면 본인은 시원할지 모르겠다. 밤에 이불킥하지 않고 두 다리 쭉 뻗고 잘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투척한 화로 인해 파편을 맞고 고통을 호소할 때가 많다. 화는 화산과 비슷하여, 한번 터지면 주변을 다 살라버린다. 화에 사로잡히면 잔인해지는 이유다. 그런가 하면, 혼자 속으로 끙끙 삭이는 방식을 취하는 사람도 있다. 일단 속에서 화를 터뜨리면 주위에 피해는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고통을 혼자 다 감당해야 하는 부작용이 따른다. 자폭했는데 멀쩡한 게 더 이상하다. 참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자폭하면 속은 너덜너덜해진다. 문드러진다.
화를 힘 있는 사람이 내면 갑질이 되기 쉽고, 힘없는 사람이 내면 진상으로 오해받기 쉽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화가 치민다고 함부로 분출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말이다. ‘표출’하는 대신 ‘표현’하면 어떨까 싶다. 화가 났을 때 여과 없이 ‘표출’하면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들이 크게 다치기 때문이다. 화는 ‘표출’하면 위험해도, ‘표현’하면 그나마 안전하다. 이를 위해서는 나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재미있는 건, 화가 났는데 왜 그런지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이 아닐 때도 수두룩하다. 짧게라도 내 감정과 마주해야, 불편한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 특히 화를 유발한 사람에게는 표현해야 한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무엇 때문에 열 받았는지를 말이다. 그냥 꾹 참고 넘어가면 다음에 또 그렇게 나온다. 그러니 알려줘야 한다. 함부로 대할 정도로 내가 그리 만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무심코 건넨 당신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무례한 것이었는지를. 이 모든 건 나를 나로 지키기 위한 행동이다. 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과 동료와 친구를 지키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
화를 밖에서 터뜨리는 것도, 안으로 삭이는 것도 내 권리이자 선택이다. 그런데 화는 반드시 분노를 동반한다. 그래서 나름 괜찮았던 사람도 기어이 잔인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분명한 건, 화를 낼 권리가 있다고 함부로 잔인하게 굴 권리까지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간과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맞대응하게 된다. 화는 눈을 가린다. 그래서 뵈는 게 없게 한다. 아마도 우리가 잔인해진다면 이때가 아닐는지.우리는 잔인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화를 표출하기보다 표현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잔인해지려는 결심을 철회하고 나를 지킬 수 있다. 더 나아가 삐뚤어지려는 독한 마음을 포기하고, 누구도 해치지 않는 안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