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3. 보조 훈련
치앙마이에서 한 달을 지내며, 스스로 선택한 날들을 기록합니다. 원하는 삶은 우연이 아니라, 실행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글이 독자에게 생각해 왔던 것을 한 번쯤 해볼 수 있는 작은 용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치앙마이 원데이클래스를 검색하면 체험 목록이 끝도 없이 나온다. 요리, 마사지, 명상, 요가. 그중에서 유독 눈에 들어온 건 그림 클래스였다. 중학교 때 미술 시간을 좋아했다. 상상해서 그리는 것보다는, 눈앞에 있는 대상을 최대한 똑같이 도화지에 옮기는게 편했다. 특히 연필로 선을 잡고 형태를 맞추는 드로잉이 잘 맞았는데, 색을 칠하지 않아도 완성된 느낌이 드는 점이 좋았다. 여행지에서도 가끔 벤치나 계단에 앉아 노트에 그림을 그렸다. 풍경을 옮겨 적듯 그리던 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색을 더하는 순간 그림을 망치는 것 같아 늘 망설여졌고, 물감을 사용하는 수채화나 유화는 먼나라 이야기로 느껴졌다.
유화는 색을 칠하는 방법이다. 마르는 데 시간이 걸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덧칠할 수 있다. 어두운 색 위에도 밝은 색을 올릴 수 있고, 덧칠한 자국이 남지 않는다. 그 설명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림인데 고치는게 가능한 방식이라니. 완성도를 신경 쓰는 편인 나에게 큰 장점으로 느껴졌다. 이번에는 색을 피하지 말고, 유화에 도전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마침 평이 좋은 체험 수업이 있어 등록했다.
“여기가 미술 체험하는 곳 맞나요?”
“네, 맞아요. 들어오세요.”
수업 공간은 2층에 있었다. 오래 된 건물을 올라가자 창고처럼 생긴 공간이 나왔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천장은 높았고, 여기저기 기대어 놓은 캔버스와 조각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알록달록한 물감이 묻은 앞치마들도 벽에 걸려 있었다. 누가 봐도 작업실이다. 누군가 매일 물감을 묻히고 창의성을 마음껏 내보이고 가는 공간 같았다.
전날 밤 한참을 고민하다 고른 사진을 보여줬다. 러닝을 좋아하니, 달리는 장면을 그리고 싶었다. 핀터레스트에서 저장해둔 사진이었다. 이걸 내가 그릴 수 있을까, 색이 너무 복잡한 건 아닐까, 괜히 욕심을 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선생님은 잠깐 사진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잠시 후 팔레트에 물감을 가득 짜서 가져왔다. 필요한 색을 보고 바로 준비해주는 모습이 신기했다. 나는 가장 작은 캔버스를 골라 자리에 앉았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기억을 끌어올렸다. 연필로 가이드 선을 긋고, 비율을 맞추고, 최대한 비슷하게 따라 그리려 애썼다. 지우개를 쓴 흔적이 남을까봐 선을 지우지도 못한 채 계속 덧그렸다. 유화 캔버스는 종이처럼 일어나지도 않는데, 괜히 조심스러웠다. 선생님이 와서 한 번쯤 봐주길 기다리며 손을 멈추고 두리번 거리기도 했다. 마음이 먼저 긴장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왜 아무도 안 오지?’
체험 수업이라면 선생님들이 돌아다니며 계속 알려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물감만 짜주고 끝이었다. 마음속에서 불편한 감정이 조금씩 올라왔다. 후기에는 친절하다고 적혀 있었는데, 내가 잘못 보고 온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문득 마음을 바꿨다. 그냥 그리면 되잖아. 실패하면 어때, 잘못 그리면 다시 칠하면 되지. 정 안되면 캔버스를 바꾸자. 그렇게 연필을 내려놓고 붓을 들었다. 연필로 그린 그림도 완성되지 않았고 선은 반듯하지 않았지만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올리기 시작했다. 두 시간을 몰입해서 색을 입혔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됐다.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게 맞았다는 걸.
나는 결과에 익숙한 사람이다. 어떤 일이든 잘해야 하고, 끝까지 다듬어 완성도를 높여야 하는 성격이다. 그림 앞에서도 같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얀 캔버스를 망칠까 봐, 기대한 만큼 나오지 않을까 봐, 아무도 평가하지 않는데 스스로를 먼저 압박하고 있었다. 잘해야겠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그림이 오히려 편해졌다. 붓을 움직이는 동작이 재밌어졌다.
불편했던 마음도 다시 돌아봤다. 선생님이 오지 않는다면, 내가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바꾸자 행동도 달라졌다.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 부분은 어떻게 칠하면 좋을지, 색을 수정하려면 어떻게 덧칠하는 게 나을지, 지금 그림에서 더 해볼 수 있는 게 있는지 하나씩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야 알게 됐다. 두 명의 선생님은 모두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래서 먼저 다가오는 데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우리는 손짓과 눈빛을 주고 받으며 의사소통을 했고, 그림은 점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완성되어 갔다. 그녀도 알려주고 싶은게 많았겠구나, 그냥 지나쳤다면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돌아갔을텐데, 먼저 말을 걸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시간이 훌쩍 지나 그림이 완성됐다.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내 손으로 끝까지 그린 그림이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 선생님들과 사진도 찍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침대 옆에 세워뒀다. 아침마다 보고 미소지었다.
미술 클래스가 가르쳐준 건 잘 그리는 기술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일단 시작해볼 수 있다는 것, 잘못되어도 다시 고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분과 태도는 생각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얀 캔버스 위에 물감이 하나씩 쌓여갈수록, 나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몇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완벽해지길 기다리느라 시작하지 못한 건 무엇이었을까.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대로 두고 지나친 감정은 없었을까.
지금, 다시 시작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림을 볼 때마다 질문들이 다시 떠오른다. 그 날을 기억하면서.
[원데이 미술 클래스]
The Warehouse - Paint Club
비용: 20x20cm 350바트 (가장 작은사이즈)
시간: 약 3시간 소요
예약: +66994245626 (라인)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음. 아이들도 체험하러 많이 오는 곳. 한국보다 저렴한 가격이 장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