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3. 보조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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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에서 한 달을 지내며, 스스로 선택한 날들을 기록합니다. 원하는 삶은 우연이 아니라, 실행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글이 독자에게 생각해 왔던 것을 한 번쯤 해볼 수 있는 작은 용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20대 초반, 배낭여행을 떠났다. 혼자 유럽을 한 달 반 동안 돌아다녔다. 처음 도착한 도시들, 낯선 거리, 기차 창밖으로 스쳐 가던 풍경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고개를 갸웃하며 북쪽인지 남쪽인지를 묻던 시기였다.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대화를 오래 이어가지는 못했다.
여행비를 아끼고 싶어 어학연수 때 알게 된 외국인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혹시 재워줄 수 있느냐고, 며칠 머물고 싶다고 말이다. 다행히 많은 친구들이 흔쾌히 허락해줬다. 덕분에 여러 도시에서 현지인의 집에 머물 수 있었다. 혼자 사는 친구도 있었고, 친구와 함께 사는 집도 있었고,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도 있었다. 여행객의 숙소가 아니라, 현지인의 일상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경험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포르투갈에 사는 친구 레오의 집이었다. 저녁이면 레오의 부모님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식탁 위에는 독특한 맛의 소스들과 빵과 스튜가 차려졌다. 그리고 먹는 내내 한국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한국은 어떤 나라니?”
“건강보험은 어떻게 되어 있니?”
“교육은 어떻게 받아?”
"정치 상황은 어떠니?"
나는 말문이 막혔다. 건강보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수능과 학원 문화, 개인 과외 같은 이야기를 영어로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고민됐다. 결국 나는 짧게 몇 마디로 대답을 줄였고, 내가 살고 있는 국가에 대해 소개도 못한채 대화 주제는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그날 이후, 침대에 누워 한동안 이불킥을 했다. 눈을 감으면 식탁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이런 표현도 있었는데. 이렇게 소개할 걸 하고. 말하지 못한 아쉬움이 오래 남았다.
치앙마이에서 며칠 지내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해외에서 한달을 지내는 동안 원어민과 얘기할 기회를 늘리고 싶다고. 배낭여행을 하던 때보다는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여전히 영어는 어려웠고 문장의 완성도를 높이고 싶었다. 몇 군데 어학원을 알아보니 그중 한 곳에서 미국인 선생님과 1:1 수업을 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미국인과 30분 이상 영어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회사에서도 해외 지사에서 한국을 방문하는 직원들은 대부분 싱가폴, 인도, 아니면 중국 국적이다. 수업 당일,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선생님의 이름은 타일러였다. 콜린 퍼스를 약간 닮은 얼굴에, 무심한 눈과 웃는 입모양을 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의 시니컬한 표정이라고 했다.) 왜 이 수업을 신청했는지, 무엇을 바꾸고 싶은지 묻길래, 편하게 영어를 사용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항상 아이들만 가르쳤다면서 성인은 오랜만이라며 반가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중국어를 배웠기 때문에 영어와 다른 언어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국 사람들은 대화 중에 공백이 생기면 어색해 해. 그래서 아무 의미 없어도 무슨 말이든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연습할 때 완벽한 문장을 만들려고 멈추기보다는 떠오르는 생각을 바로 말하도록 해봐."
"영어는 중요한 것부터 말하고, 그 주변을 덧붙여 설명하는 언어야. 필통에 담겨 있는 펜을 설명하려면, 펜에 대해 설명하고 필통에 대해 얘기해주고 필통이 놓여져 있는 책상이나 방에 대해 설명하면 돼. 영어는 묘사의 언어라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도록 말하면 대화가 훨씬 잘 풀릴거야."
"영어의 단어의 기원을 보면 배와 관련된 단어들이 많아. Onboarding 같은 경우도 배에 올라 타는 모습이잖아. 배에 적응하는 것처럼, 신입사원이 회사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과정인거지. 다른 단어나 구문에서도 배와 관련 된 단어들을 많이 볼 수있어."
그의 설명은 언어의 기원에 가까웠다. 문법보다 문화에 대한 내용이었고, 실생활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국에서는 수업 때도 들어본 적 없던 이야기들이 많아서 타일러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궁금한 것이 생기다 보니 질문과 대답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영어라는 언어로 이야기 하고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정확한 문법이나 문장으로 대화가 이어지는게 아니었는데도, 서로 같은 관심사를 주고받으니 훨씬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체험 수업 이후, 우리는 열 번의 수업을 더 함께했다. 완벽한 문장과 발음에 집착하기보다, 대화를 끊지 않는 쪽에 신경을 썼다. 틀려도 말했고, 막히면 다른 표현으로 돌려 말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말이 더 잘 나왔다. 예전처럼 문장을 머릿속에서 완성시키느라 멈추지 않아도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너무 오래 영어를 부담스럽게 대해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치앙마이에서 만난 홍콩 국적의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홍콩에서는 영어로 말하면 주변에서 문법이 틀렸다고, 발음이 이상하다고 쉽게 지적한다고. 그래서 오히려 영어를 덜 쓰게 된다고 말이다. 그 말을 떠올리며 나도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도 영어를 완벽하게만 말하려고 애쓰고 있진 않았을까, 하고.
수업을 마칠 즈음, 영어에 대한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막히는 순간은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움츠러들지는 않는다.
완벽한 영어보다, 상대방에게 집중하고 대화에 머무는 일이 먼저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