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론적 사회화 이론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근래 젊은 세대의 문화의 분위기는 서로에 대한 혐오와 비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사이에는 이성을 향한, 타 세대를 향한, 타 인종을 향한, 다른 가치관의 사람들을 향한 혐오가 팽배해있으며 ‘남혐(남성 혐오)’, ‘여혐(여성 혐오)’, ‘맘충(엄마들을 비하하는 말)’, ‘틀딱(틀니 딱딱)’ 등 타인이 들었을 때 매우 ‘혐오’스러운 단어들이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백 번 양보하여 그러한 타인에 대한 혐오를 개인의 의견으로 존중한다 하더라도 세월호 참사 직후 온, 오프라인으로 퍼진 한 커뮤니티의 만행들, 이성을 혐오하는 자들의 발언과 행동들은 ‘악하다’라는 대중의 평가를 받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저성장의 일반화(뉴 노멀)에 따른 결과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으나, 그것이 그들의 혐오문화와 더불어 이슈가 되는 사회적 문제들을 정당화할 적당한 이유는 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의 교육과정 속에서 최소 9년, 길면 12년 이상 바른생활과 도덕, 사회 과목을 배우며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할 줄 알게 되었고, 가정과 학교 등 크고 작은 사회 공동체에서 긴 시간 사회화가 된 사람들이 왜 그처럼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비도덕적인 언행과 행동을 일삼는 것일까? 한국의 도덕교육이 잘못된 것일까? 그들이 도덕을 체화하도록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던 도덕교사의 잘못이었을까? 비단 한국만 그런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다 보면 우리는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사회학의 큰 기류였던 기능론적 사회화 이론의 이론에 대한 비판에 다다를 수 있다.
저명한 기능론적 사회론자인 에밀 뒤르껭이 살던 19세기의 유럽은 급격한 도시화와 갈등으로 인해 무질서와 혼돈의 시대였다. 이 속에서 그는 어린 아이와 같은 미숙한 인간을 새로운 인간으로 창조하는 ‘교육’이라는 과정을 통해 그러한 혼돈을 바로잡고 안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점에서 교육은 본질적으로 사회화와 사회규범의 전수라고 생각했다. 그가 그러한 맥락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바로 ‘도덕교육’이다. 그는 아이들이 도덕교육을 통해, 합의된 한 사회의 중심 이념과 가치를 내면화하고 구성원 의식을 가지게 되어 유기적 연대를 만들 것이며 궁극적으로 안정된 사회를 만들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교육을 매우 절대적인 것으로, 인간을 매우 수동적인 존재로만 보았던 점이다. ‘도덕교육을 실행하면 학생들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마치 ‘공급이 많으면 수요가 많을 것이다.’와 같은 매우 1차원적인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 개개인은 개인의 의지가 있고, 스스로의 의사결정이 가능한 존재들이며, 배운 대로만 행동하고, 입력된 대로만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제공된 도덕교육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는 그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아이의 사생활’이라는 유명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서울대 교육학과 문용린 교수는 도덕성에는 의지와, 의사결정, 민감성과 연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의 ‘혐오’문화가 범죄로, 악행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으려면 한국 도덕교육은 어떠한 변화를 거쳐야 할까? 크게 두 가지 정도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겠다: (1) 아이를 자율적 존재로 인식하고 도덕 수업시간에 배우는 사실에 대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회를 줄 것, (2) 아이가 옳다는 결론에 다다른다면 그것을 직접적으로 실천하고 체화할 기회를 줄 것. 즉, 아이가 어떤 도덕적 원리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리라는 막연한 가정이 아닌, 아이의 주체성을 존중하고 직접 그 원리에 대해 고민할 거리와 시간을 충분히 제공하며 그것이 옳다는 생각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한 발 더 나아가 그 옳다고 판단한 것에 대해 연습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한다면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도덕적 원리의 주인공이 되고, 자라서 현실 세계에서 도덕적 문제에 부딪혔을 때 올바로 판단하고 즉시 실천에 옮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아이들이 사회 구성원이 되어 살아간다면, 지금보다는 더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고찰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