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난 몇 년간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한 문장이다. 흐름이 있었고 그 흐름에 쓸려오듯 지나왔다. 흐름이 약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제대로 서 있기 힘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흐름을 거스르지는 않았지만, 타고 가던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으로 갈아탔던 적은 있었다. 그 선택은 지난 십 년 간의 삶의 방향을 조금 바꿔 놓았고, 지금의 이 미국 남부 어딘가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2008년 언젠가, 지금도 가끔 일기 같은 글을 끄적이고 있는 티스토리 블로그를 열면서, 정채봉 시인의 "첫마음"이라는 시를 적어두고는 닭살이 돋는 토막글을 적었던 일이 있다.
2007년 1월 31일,
위병소를 나서면서 먹었던 첫 마음.
이제 진짜 멋지게 살아보겠다고
지금부터가 내 인생의 시작이라고
굳게 마음먹으며 마지막 경례를 하던
그 순간, 그 마음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사실 이 글은, 아래 적어둔 그 시와 함께 보아야 덜 닭살이 돋는다.
첫마음, 정채봉
1월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군 생활 중에 탐독하던 "샘터"라는 월간 잡지가 있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와 함께 공식적으로 부대 안에서 읽을 수 있던 잡지였는데 (물론 선후임들이 휴가 때마다 몰래몰래 반입해오던 GQ, 에스콰이어, 맥심[!] 등의 잡지들도 있었다) 나는 샘터를 더 좋아했다. 지독히도 지루한 6개월 해안 경계작전에 투입되면 외딴 바닷가에서 즐길 거리가 많지 않았다. 요즘 생각해보면 스물두 살의 나이에 상당한 아재 취향이었지만 그 잡지에 담긴 따스한 이야기들이 참 좋았다.
이 "첫마음"이라는 시는 그 잡지에서 처음 접했다. 정말 대단한 시였다. 하고 싶은 게 많던 때였다. 그래서 더욱 가슴을 뛰게 만드는 시였다. 한 달 간의 인도 배낭여행을 마치자마자 나흘 만에 입대를 하였고, 인도에서 본 그 넓은 세상을 느끼고 되새기고 감미할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훈련소에 입소했다. 살아남기 위해 애쓰던 일 년이 지난 후에야 미래를 살펴볼 시간이 찾아왔다. 앞으로 일 년이 더 지나고 나면, 이 바깥세상으로 나가서 멋진 시작을 하고 싶었던 때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곳을 떠나는 날, 자유의지에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을 그 날이 오면, 그때 그 마음 첫 마음 절대 잊지 않고 가슴에 품고 살겠노라고.
가슴에 새겨오던 말이다. 힘이 들 때면 항상 이 말을 기억하고, 지금 이 일을 시작할 때의 첫 마음이 무엇이었나 되새겨보았다. 앞으로 로봇을 연구하겠노라고 마음먹었던 때, 그래서 열심히 여러 길을 찾으며 몸으로 부딪혀 보던 때,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던 학부 4학년 때, 박사 유학을 마음먹었던 때, 석사 첫 학기, 토플 새벽반 수강증을 끊던 그 날, 유학 나오던 그 날, 결혼하던 날, 아들이 태어나던 날, 인턴 출근 첫날. 이렇게나 많은 각기 다양한 첫 마음들이 있어왔다.
이제 또 다른 시작을 앞두고 있다. 박사 학위 디펜스를 잘 마치고 졸업 논문도 제출한 지금도 두 달뒤 미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어떻게 흘러가든 간에, 두 달 뒤에는 또 다른 시작을 앞두고 새로운 첫 마음을 먹을 것이다. 그 첫 마음이 바쁜 일정으로 인해 흐리멍덩하게 기억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첫 마음을 준비하기 위해 이 브런치 계정을 열었다. 그리고 글을 쓰고 있다.
앞으로의 두 달은 간절함으로 가득 찰 것이다. 지금까지 그 어떤 때보다 훨씬 더한 간절함으로.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할 것이다. 마음고생도 많이 하겠지만 설렘 또한 많을 것이다. 그 설렘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 간절함을 기억하기 위해서 나의 생각을 이 곳에 기록할 계획이다.
그 뒤로는 어떤 글로 채워나갈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은 거의 즐기고 있지 않은 몇 안되는 취미인 사진찍기를 다시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진으로 채워나갈지도 모르겠다. 그런 건, 그 때가서 생각하도록 하자.
2016년 6월 22일 어느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