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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방끈수공업자 Mar 26. 2018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동안 잊지 말아야 할 것들.

미국에 유학을 나와서 졸업의 시기가 다가오기 전까지는 행복했던 기억들이 많다. 물론 어렵고 슬픈일도 있어왔지만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은 "참 좋은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공부와 연구가 힘들때도 많지만 스스로 택한 길이고 한국에서 이 모든 것을 하고 있었다면 더 큰 어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슬럼프에 빠질 때면, 남들 대학 졸업하고 취업해서 열심히 돈 모으고 있을때 대체 여기서 뭘하고 있는건가, 저 옆에 저렇게 좋은 성과를 내는 사람들에 비해 대체 제대로된 연구를 하고 있기는 한건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지만 다시 곧 이렇게 내 돈 들이지 않고 박사학위를 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다시금 감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졸업의 시기가 다가오면서 어둡고 긴 터널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졸업 몇 달 전부터 다음 자리를 찾기 위해 애를 썼지만 손에 쥐어지는 것은 없었고 한없이 바닥을 향해 내려가는 기분 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겨우 포닥자리를 잡았지만 포닥생활은 하루하루 버티는 것도 힘든 날들의 연속이었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잡일들, 제안서 작업, 오타 고치고 문서 포맷 수정하고 문서에 들어갈 그림 그리고, 연구 일정표 작성하고, 엑셀로 예산 작업하고, 논문들 읽고 리뷰하고, 뽑을 학생들 지원서 검토하고 인터뷰하고, 랩에 관심있는 학생들 만나서 연구 설명해주고, 방문객들 오면 데모 준비해서 보여주고, 학생들 연구도 봐주고, 프로젝트 매니지하고... 짧은 포닥기간동안 내 연구 깊게해서 좋은 실적 내서 나가는 것이 목표였는데 연구할 시간은 좀 처럼 나지 않고.. 연구해야 한다고하면 PI는 이번 제안서 일단 내고 생각해보자고하고.. 내고 나면 또 다음 제안서 얘기가 시작되고.. 1년 반의 시간동안 거의 8개의 제안서 작업에 매달리느라 연구는 뒷전인 날들이 참 많았다 (+ 포닥 마칠 시점에서 종합해보니 20개월 동안 제안서 13개 씀). 그렇다고 여기저기 연구에 조금씩이라도 참여해서 저자가 될 만큼의 기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아이디어를 내서 시작된 연구에 정작 나는 시간이 없어서 끼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논문이 되어서 출판되고 내가 대부분을 썼던 제안서에서 발췌되어 쓰여진 논문에도 이름이 올라가지 않고...


이 깜깜한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다 그만두고 싶었다. 어떤 하루는 땅만 보며 한숨만 푹푹 쉬며 걸었던 적도 있었다. 어떤 하루는 눈물이 날 정도로 힘들어서 캠퍼스 외진 곳을 조용히 걷고 또 걷기도 했다.


그저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이라는 말처럼 묵묵하게 감내하고 지냈다. 그러다 2년차 재계약이 이뤄진 후에는, 이제 2년 이후에는 더 이상 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될대로 되라며 불만사항들을 PI에게 이야기하였다. 논문을 써야하는데 연구할 시간이 너무 없다고 여러번 징징댔더니 실험을 도와줄 석사과정생 한 명을 붙여주었다. 잡일 처리에도 요령이 생겨서 적당히 모른척도 하니 일도 조금씩 분배가 되기 시작했다. 1저자 논문도 몇 편 내고, 공저자 논문들도 조금 낼 수 있게 되었다. 포닥으로서의 첫 1년은 혹사당하고 스트레스 많이 받았지만 그게 밑거름이 되었는지 마음이 더 단단해지고 스트레스에도 내성이 생겨 2년차는 비교적 편한 마음으로 보내고 있다. (그동안 힘들때면 군생활이랑 유학준비하던 시절 생각하며 그때보단 낫지않나 생각하며 버텼는데 이제 그 기준이 포닥생활로 바뀌었다. 뭘 해도 그때보단 나을 것 같다.)


하지만 아직까지 터널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왜 터널에 들어섰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 곳이 내 나라가 아니라서 그런가? 아니면 아직 내 목표를 성취해가는 과정 속에 놓여있기 때문인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터널은 끝나는 것인가? 포닥을 마치고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터널이 끝나나?


이제는 헷갈리기까지 한다. 잠깐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인생이라는 것이 아주 긴 터널 속을 지나는 여정인 것인지, 그래서 그 시작과 끝은 탄생과 죽음으로만 존재하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지금 지나고 있는 곳은 벽만 짚고 걷던 지난 1년반 보다는 조금 더 밝은 곳이라서 칠흑같은 막막함으로 가득하지는 않다. 언제쯤 터널을 벗어날 지, 아니면 언제쯤 하늘이 환하게 뚫린 구간으로 들어설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다만, 그 길이 너무 절망적이거나 너무 외롭지않은 이유는 바로 손 맞잡고 걷고 있는 나의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웃음과 농담, 나는 원래 유쾌하고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것, 지금 잠깐의 어려움이 날 힘들게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결국 이것 또한 지나간다는 것,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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