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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방끈수공업자 Aug 01. 2021

교수의 방학

한달도 안남았네요..ㅠ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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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수 지원, 인터뷰 : https://brunch.co.kr/magazine/usprof



박사과정을 마치면서 '아.. 이제 시험과 방학은 더 이상 내 인생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물론 우린 살면서 항상 시험에 들죠ㅎㅎ그러다 교수가 된 이후로 첫 방학을 맞아 학생 때 같은 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마냥 놀기만한다는 것은 아니구요..ㅎ "학생 때 " 같다는게 중요한데, 박사과정 때도 방학이면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서 너무 좋았던 것 처럼 지금도 제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연구 때문에 자리에 앉았는데 브런치에서 갑자기 알림을 보내네요. 180일 동안 글을 안썼다고.. 물론 당연히 시스템에 설정된 메시지겠지만 밖에 비도 오고 시원한 커피도 준비되어 있어서 글을 쓰기에 딱 좋은 환경이네요. 가볍게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말씀드려볼게요. 


방학을 논하려면 1학기 이야기를 좀 해야합니다. 첫 학기라 그랬는지 굉장히 정신없게 보냈습니다. 두 과목을 강의했는데 선배 교수님들 덕분에 참고할만한 강의 교안은 구할 수 있어서 자료 만드는 일은 부담이 적었습니다. 가장 큰 시간과 노력을 들인 부분은 매주 강의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완벽히 준비가 안되면 불안해지는 성격이라 한번씩 "리허설"을 해봐야지 강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한 과목은 제가 너무도 잘 아는 내용이라 적당한 준비로도 충분했는데 다른 한 과목은 증명에 증명이 연속이라 준비도 쉽지 않았고 실제 강의에서 증명을 매끄럽게 해나가는 것도 진땀을 빼야했습니다.


비대면 환경에서 수업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과 시험을 치루는 일도 낯설었습니다. 학생들도 비대면을 선호하고 강의자 입장에서도 적절한 툴 사용만 익숙해진다면 편리한 부분도 있습니다. 일단 강의실로 이동하는 시간이 없고 앉아서 수업을 할 수 있구요. 일정이 있는 날은 휴강하고 보강하는 대신 녹화한 강의를 올려둘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편리함과 교육적 효과는 반비례 하는 것 같습니다. 직접 얼굴을 보지 못해 이해도를 확인하기 어렵고 무엇보다 학생들이 소속감과 현장감을 느끼지 못하는게 안타깝습니다. 더욱이 코로나가 시작되고 입학한 20, 21학번 학생들은 오프라인 학교 생활을 거의 해보지 못했는데 대학생활이라는 것의 낭만도 전혀 못느끼고 고등학교 시절 인강 듣던 생활과 별 다를 바 없이 지내는 것이 괜시리 미안합니다.


학교, 학과 행정업무는 꽤 많습니다. 제가 아직 신임교수라 일이 막 넘어오지는 않습니다만 일단 여러 부서나 학과에서 요구하는 자잘한 서류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연구실 소개자료, 약력, 수업 관련, 교육/워크샵, 무슨무슨 계획, 영수증 처리, 연구비 관리 등등 하나 하나는 작지만 주로 긴급하게 시일이 다 되어 요청받는 것이 많아 일의 흐름이 끊기고 이런 작업이 많은 날은 오늘 뭐했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학교에서 지원하는 큰 사업의 제안서 집필진으로 차출(?)되어 한 달 이상 주말도 없이 작업을 했던 일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 많아 지겠지요.


수업 외에 연구는 거의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일단 대학원생이 아직 없구요. 학부 연구생들이 조금 있긴 한데 학기 중엔 학생들도 수업 때문에 바쁘고 저도 바쁘고 하다보니 거의 기본기만 쌓는 시간이었습니다. 방학이 되어 이제 좀 뭔가를 진행해보고 있는데 아직 제 연구 분야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어서 계속 가르치고 연습하는 시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방학이 지나면 좀 쓸만(?)해질 것 같은데 이 학생들은 대학원 진학에는 별다른 의지가 없어서 얼마나 시간 투자를 해야할지 고민입니다.


그 밖에 여기 오기 전에 같이 연구하던 학생, 연구원들과 지속적으로 온라인 미팅을 해오며 논문 제출도 하고 제출했었던 저널 리비전도 하고 그래서 성과물이 좀 나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곳에 와서 새로 시작한 연구는 0이기 때문에 내년의 실적은 바닥을 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나마 큰 과제를 하나 따서 승진 점수를 채웠고, 나머지 점수를 채울 논문 목표치는 그럭저럭 해볼만한 수준이라 크게 걱정이 되진 않습니다. 사실, 부담은 되지만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뭐 어떻게든 되겠죠. 통계적으로 봤을 때 저는 이런 허들을 넘는데 실패한 적은 없었으니까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믿음으로 불안함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이런걸 '정신승리'라고 하죠!)


이런 한 학기를 보냈기 때문에 방학은 무척이나 소중했습니다. 방학동안 2학기 수업 준비, 연구 등 해야할 일이 산더미지만 번아웃이 찾아올 지경이라, 종강한 이후로 1-2주 정도는 이른 휴가도 보내고 좀 내려놓고 편하게 지냈습니다. 상담, 성적처리, 학과 일 등 업무만 하면서요. 그러다가 6월 말이 되고 나니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 과목당 26강의 강의를 해야하는데 하루에 1회 수업 분량의 자료를 만들어도 52일이나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학기는 참고할 교안도 없고 제가 처음부터 만들어야하기에 시간의 부족함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약 한 달간은 강의 자료만 매일 만들었고 중간고사까지의 자료는 완성해두었습니다. 


계산을 해보면 하루에 1강도 다 완성을 못했던 건데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학부 때 너무 낡고 성의 없다는 느낌이 드는 강의 자료들을 가끔 만날 수 있었는데 그런 느낌을 주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슬라이드 한 장 한 장 많은 고민을 하며 만들다보니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만들고 나니 뿌듯하더라구요. (최신의 자료들로 채웠으니 앞으로 몇 년은 울궈먹을 수 있겠지?!) 8월에는 그럼 기말까지의 자료를 만들어야하는데 이러다가 연구는 또 손도 못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은 수업 준비는 잠시 쉬면서 연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학생 때 같다는 말씀을 드렸었는데 방학이다보니 행정 업무 거의 없고 수업을 하지 않아도 되니 시간이 많이 자유롭습니다. 박사과정 때는 거의 매일 밤을 새고 아침 6시쯤 잠들어서 낮 12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했었는데 (저는 밤에 집중이 잘 되더라구요) 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새벽 3시 - 9시 정도의 수면을 하는데 정형적인 생활 패턴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저는 참 좋더라구요. 


두서가 없었습니다만 교수입장에서의 방학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교수가 되면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을거라는 착각이 깨진 한 학기를 보내고, 방학 때 연구를 몰아서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틀렸다는 것을 깨달은 방학을 보내고 있습니다. 몇 학기 돌면서 제가 담당할 과목의 풀이 고정이 되고 그 과목들의 수업 자료가 다 마련이 된 후에는 수업 준비 말고 연구로 방학을 채워보고 싶습니다. 궁금하신 점은 댓글로 달아주시면 최대한 말씀드려볼게요. 더운 여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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