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전력투구는 번아웃을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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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닥으로 살아가기 : https://brunch.co.kr/magazine/postdoc
미국 교수되기 : https://brunch.co.kr/magazine/usprof
제 글을 기다리시는 분들은 많지 않겠지만 글을 쓰지 않는 동안에도 조금씩 늘어가는 (하지만 아직 미미한..ㅎㅎ) 구독자 수를 보면서 글 빚에 대한 독촉을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방학 내 수업 준비를 하고, 학기 중에 하기 힘들었던 개인 연구를 하다가 개강하고 막판 스퍼트를 내어 논문을 하나 제출하고 그 이후엔 뭐가 바빴는지 기억도 안나는데 벌써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왔네요. 열심히 시험 문제를 내고 났더니 다음주는 강의가 없다는 여유로운 마음에 글 빚을 갚으러 나섰습니다. 오래도록 갖고 있던 생각 하나를 풀어보겠습니다.
장기 목표를 향해 나아가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글 입니다.
1년 정도 단기적으로 준비해서 시험을 보는 수험생들은 100%, 아니 200% 최선을 다해서 쉬지 않고 공부를 해야합니다. 나름 수능 벼락치기(?)를 해본 사람으로서, 목표가 명확할 때 완전한 몰입이 가져오는 폭발적 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까지 중간, 기말고사라는 초단기 목표만 가지고 공부를 했던 제게 1년이라는 수능 준비 기간은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매일 독서실 문 닫는 새벽 2시까지 공부하고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어머니가 태워주시는 차에서 졸린 눈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틈날 때마다 쪽잠을 자면서 매일 문제풀이를 하고 오답노트를 만들고 반복에 반복을 하던 시간... 그렇게라도 했기 때문에 그나마 제 모교 정도라도 입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렇게 한 것 치고 최상위권 대학을 가진 못했습니다..워낙 베이스가 부족해서ㅎㅎ)
재수할 생각은 해본 적도 없습니다만, 재수를 했으면 "샤"대를 갈 수 있었을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1년은 공부와 관련 없는 거의 모든 것을 끊고 집중할 수 있는 최대의 기간이었습니다. 단기 목표는 자기가 가진 최대한을 쥐어짜서 이뤄내야 하는데 그렇게 쥐어짰을 때 각자 버틸 수 있는 최대 기간이 있을겁니다.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기간에 맞게 목표를 설정하고 성공을 일궈낼 수 있을거고, 버티고자 하는 기간을 능력보다 길게 잡거나, 100%를 쥐어짜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실패를 맛볼 것 입니다.
그런데 장기 목표는 조금 다르더라구요. 연구자의 길을 걷고자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것은 장기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님아 그 길을 건너지 마시..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처럼 비교적 장기간 준비해야하는 시험과는 조금 다릅니다. 디펜스와 같은 시험 비스므리한 것들이 있지만, 평가 기준도 굉장히 주관적이고 뭐 하나 딱 떨어지는 기준이 없습니다. 이렇게 정답도 없고 이만하면 됐다, 라는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보니 지치기가 쉽습니다. 제 주변에는 그래도 성실하게 박사학위를 쟁취해낸 분들이 많지만 중간에 진로를 바꾸는 일들이 왕왕 있는 것이 이 바닥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박사? 그거 너무 열심히 하지 마시라구요.
박사 과정 마지막 1년은 어둡고 그늘진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는 "난 이거 아니면 안돼", "박사 못하면 인생 망치는거야"라는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이쯤 되면 졸업을 할 시기인데 완성도와는 거리가 있어보이는 제 연구가 절망감을 더욱 키웠습니다. 그렇게 고군분투 끝에 디펜스를 잘 마치게 되었습니다만 잡서치에서 또 다른 벽에 부딪혔습니다. 정신적으로 깊은 수렁 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던 어느 날, 이러다간 내가 버텨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해결책으로 "정신 승리"라는 묘약을 찾아냈습니다.
그래, 이 연구가 내 인생 자체는 아니야. 나에겐 연구 말고도 소중한 것들이 많아. 나는 연구가 아니라도 다른 것으로도 빛날 수 있어. 그리고, 반드시 빛날 필요도 없어.
말씀드린 것 처럼, 이건 "정신 승리"였습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한 그 막다른 길 끝에서 나름의 도피처를 찾은 것이지요. 하지만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평소에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요리를 업으로 삼는 삶에 대해서도 상상하며 압박감을 덜어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죠. 나는 연구말고도 잘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아니, 연구할 때 쏟은 열정과 성실함이라면 다른 어떤 것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그걸로 나와 내 가족의 앞가림은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마음이 한결 놓였습니다. 꼭 연구로 성공해야겠다는 부담을 덜고나니 꼭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만큼 제 마음엔 조금씩 여유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시간적 여유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 나를 위한 시간으로 채워넣었고, 연구에 대한 압박을 덜어내고 생긴 심리적 여유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자신감으로 채울 수 있었습니다.
포닥을 마치고 정규직 연구원이 될 때까지 이런 마음을 지속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미래가 불투명하고 매일 바쁘더라도 매일 저녁 아이의 목욕을 시키고 같이 노는 시간을 가졌고 주말은 가족을 위한 시간으로 썼습니다. 매 시간을 연구로 채워 넣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갈 수 있는 힘을. 지치지 않게 만들어 줄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저와 같은 상황에 놓인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아니, 그때의 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너의 연구는 너의 인생이 아니라는 것. 연구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을 담보하지는 않는 다는 것. 연구의 성공만으로 네 인생의 가치가 매겨지는 것은 아니라고. 연구에서 성공해도 인생은 불행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연구는 조금 더디게 나아가고 있더라도 쉬고 싶을 땐 조금 쉴 수 있는, 네 연구의 성공을 위해 가족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너무 연구에 몰입하지 않는 그런 마음가짐이 너를 더 오래, 더 멀리 가게 해줄 것이라고. 그러나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자기 자신을 보살피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라고. 그러면 그 어둡고 그늘진 시간이 조금은 밝고 즐거운 기억들로 채워질 것이라고.
자,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고 계신 여러분. 거 너무 열심히 하지 말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