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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방끈수공업자 Jan 13. 2022

[상담소] 정출연 vs. 대학

질문 받습니다 : https://brunch.co.kr/@cnam/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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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는데 브런치에는 "제안하기"라는 기능이 있더라구요. 그 기능을 통해서 상담요청을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바쁜 일들이 있지만 진지한 고민이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네요. 


정출연과 대학 사이의 고민. 행복한 고민일 수 있지만 이 선택을 해야하는 사람에겐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학령인구 감소로 시작되고 있는 대학의 위기로 인해 예전 같으면 당연히 비교 우위에 있던 대학 교수라는 위치가 점점 하락하고 있습니다. 저도 정출연에서 대학으로 넘어올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여기 오시는 분들 중에도 같은 고민을 하시는 분들이 계실 수 있어 문의 주신 분의 동의를 얻어 제 답변을 공개합니다. 공개된 곳에 쓰기 어려운 내용들은 뺐고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도 좀 더했습니다. 


주된 내용은 정출연과 대학에서 느끼는 장단점입니다.


정출연

- 정출연 중에서도 순수하게 연구를 할 수 있는 조직이 많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하게 연구를 하려면 기관자체의 출연금 사업이 풍부해야하는데 (따라서 외부 과제 따올 필요 없이 하고 싶은 연구 주제로 내부 과제 만들어서 연구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제가 있었던 곳은 정출연 중에서도 PBS 비율이 낮은 편으로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부 사업 규모가 크진 않습니다. 대학원생 또는 인턴 연구원 1명 정도 인건비 올리면 장비 하나 사기도 좀 버겁습니다. 그러면 외부 수탁 과제를 열심히 따야하는데 하고 싶은 연구랑 딱 맞는 과제 공고가 있기가 어렵죠. 대충 맞으면 하는거고 그마저도 연구보다는 개발에 가까운 것들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학교보다는 회사에 가까운 조직이기 때문에 책임급 연구원들이 자기 과제에 아직 연구비가 충분치 않은 선임급 연구원들을 밀어 넣는 것이 대부분의 현실이라 선임급들은 시키는 연구 해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이게 장점일 수도 있습니다. 머리 싸매고 열심히 만들어나가지 않아도 그냥 시키는대로 하다보면 뭔가를 하고 있습니다. 


- 대학들처럼 학령인구에 감소에 따른 위기감은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출연들도 학연생, 인턴 등의 젊은 비정규직 인력으로 연구진이 채워지는 상황에서 (정규직 연구원의 TO 자체가 많지 않고 기관에서 정하는 것이 아니라 NST라는 곳에서 정해줍니다) 학령인구의 감소는 연구 인력의 감소와 직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점점 인턴으로 1년 미만으로 지내고 가는 인원들이 많다보니 연구의 연속성이 자꾸 끊어지고 정규직 연구원들이 계속 발로 뛰어야합니다. 즉 대학에서의 지도교수와 같은 역할(관리, 방향 설정 등)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 학교에 비해 인건비 부담이 큽니다. 포닥 인건비는 거의 선임 연구원 인건비랑 같습니다. 인력 구조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인턴들도 인건비 지급기준이 꽤 높고 여기에 4대보험, 퇴직금까지 같이 나가기 때문에 과제 인건비 부담이 큽니다. 그러다보니 소규모 과제를 따서는 인건비 지급하면 남는 연구비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컨소시움을 꾸려야하는 큰 규모의 과제 위주로 수주를 하게 되는데 규모가 커지면 관리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큽니다. 대여섯개 기관 끌고 과제 실무하면 논문 쓰기는 어렵습니다. 과제만 잘 마무리 되어도 다행입니다. 이런 과제 3개 정도 실무를 맡아서 하면 1년 금방 지나갑니다. 올해 뭐했나 돌아보면 과제 관리만 한 것 같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하는 일 하면서 +알파로 본인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충분히 될 수 있습니다. +알파로 해야한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논문이 연구소의 주된 실적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연구소의 가장 큰 실적은 연구 과제 수주와 기술이전입니다. 논문은 NCS나 상위계열 자매지, 최상위 JCR 논문처럼 뭔가 대외 홍보하기 좋은 것들 제외하면 별로 신경 안씁니다.) 과제 평가나 협약 시즌만 아니면 시간 쪼개서 또는 일과 시간 이후에 마음껏 연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학생이나 인턴들까지도 일과 시간 이후에 연구를 진행하게 할 수는 없으므로 대부분의 연구는 스스로 진행해야합니다. 다행히 유학이나 진로 때문에 논문, 연구 욕심이 많은 학생과 인턴들이 있다면 그래도 으쌰으쌰하며 연구할 수 있습니다.


- 행정직과의 마찰, 불편함 등이 있습니다. 서로 입장 차이가 크다보니 생기는 일 같습니다. 행정직 입장에서는 연구직들이 갑질한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박사들이다보니 대우받고 싶어하는게 분명히 있습니다. 여긴 연구소고 연구소는 연구가 젤 핵심인데 나는 연구자고, 당신들은 다 내가 따오는 연구비에서 간접비 떼어가서 월급 받아가는데 나한테 이러면 되겠어? 이런 생각으로 말이죠. 행정직 입장에서는 나중에 감사에 걸리면 징계 받고 피곤해지는건 행정인데 제발 말 좀 들으라는 입장입니다. 우리가 서포트 안하면 돌아가는거 하나도 없는데 나한테 이러면 되겠어? 이렇게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거죠. 어느 한 쪽만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암튼 이런 대립 관계로 인해서 피곤한 일이 많습니다. 쓸데없는 페이퍼웍과 절차들이 참 많습니다. 


- 과제 많이 하면 인센티브가 좋아서 수입이 괜찮습니다. 다른 강연, 자문, 심사 등의 부수입은 교수에 비해 많지 않습니다.


- 인생에 연구가 1순위가 아니며 연구 외의 가족, 취미 등의 삶이 더 중요하다, 명예보다는 실속이 중요하다, 혼자 이끌어가는 부담, 책임감은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하면 정출연만큼 좋은 직장이 없습니다. 


- 책임 연구원들이 자기 과제에 선임 연구원들을 부하 부리듯 실무를 맡기는 것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시고 본인이 책임으로 수주하는 과제를 만들고 선순환 구조를 만들면 정출연 생활에도 나름 독립성이 생기고 대학에서 하는 것처럼 연구실을 운영해나갈 수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과제만 수주하며 지낼 수 있습니다. 제가 이걸 빨리 깨달았다면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지 않고 지금 정출연에서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참고로 악순환의 고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 들어가서는 연구비가 없음---책임 연구원의 과제에 들어가서 실무함---과제 관리 하느라 내 과제 만들 시간 없음---이번 과제 끝나면 학생들, 인턴들 인건비 지급할 연구비가 없음---또 다시 책임 연구원의 다른 과제에 들어가서 실무함 (킬포는 여기서 하는 과제들이 나의 박사과정 연구랑 연속성이 없고 과제마다 다 방향성이나 주제가 달라서 커리어가 쌓이지 않음)


- 명예는 별로 없습니다. 교수랑 비슷한 명예를 가진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오시면 실망하십니다. 그냥 연구원1, 연구원2 입니다. 연구소는 연구하는 곳입니다. 그것만 미리 깨닫고 오신다면 실망하실 일도 없습니다. 다만 보직을 맡아서 본부장, 소장, 원장 이런 직함을 달면 갑자기 명예가 급상승하는 것 같습니다. (많이들 하시려고 하는 것 보면요.)


대학

- 대학 전반에 불어닥치는 위기에서 자유로운 대학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공립대 교수의 경우 교육 공무원의 신분이 보장된다고는 하나 학교들의 통폐합이 명약관화한 상황에서 앞으로의 고생길이 상당할 것임은 분명합니다. 학교가, 또는 학과가 통폐합되면 첫째로 교원들의 자존감 하락, 명예의 실추가 예상됩니다. 또한 학과에 오래 있으면서 루틴화 되어 있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 루틴이 깨집니다. 새로운 일들이 계속 생길 수 있고 새로운 강의를 계속 맡거나 심지어는 잘 모르는 내용을 공부해서 가르쳐야할 수도 있습니다. 통폐합이라는게 신분 보장되니 오케이, 라고 생각하면서 편안히 바라볼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굉장한 충격, 혼란, 좌절감 등이 따라올 것입니다.


- 사립대의 경우 더 심각합니다. 지방사립의 폐교는 이미 시작된 일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60대쯤 되신 교수님들은 그냥 일찍 은퇴한다고 생각하시면 될텐데 학교였으면 아직 한창일 40-50대의 교수들은 학교 밖으로 나가면 상황이 좀 애매해집니다. 기업에서는 적은 수의 중간관리자급을 경력직으로 뽑기는 할텐데 실무 경험이 전무하거나 거의 없는 교수 출신을 뽑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다른 대학의 강사, 강의전담교수 등의 비정년 전임으로 가야하고 직업의 안정성은 하루 아침에 무너집니다. 학원 강사, 입시 상담 등의 길도 있겠으나 더 이상 연구를 하고 지낼 수는 없겠죠.


- 많이 쳐줘서 상위 20개 정도 대학을 제외하고는 연구에 대한 욕심은 내려 놓으셔야합니다. 일단 연구 외에 할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수업준비, 사업 제안, 운영, 학과 업무, 학부생 지도 등등.. 교수가 되어도 직접 연구를 하고 싶었는데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대신 대학원생들이 많이 있으면 잘 지도만 해줘도 연구가 진행됩니다. (개인적으로 교수의 역할은 연구가 아니라 연구를 잘 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키우는 거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연구를 하겠다는 저의 초기 생각은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20개 정도 대학에 들어가는 저의 학교 마저도 우수한 대학원생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실력과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다 상위권대나 해외로 나갑니다. 


- 학생들이 들어와도 만족하기 어렵고 내가 이런 것까지 알려줘야하나? 하는 자괴감을 많이 느낍니다. 교육자의 마인드를 갖추는 것이 중요한데 저는 아직은 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런 것까지도 알려주면서 내가 이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아주 좋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하나하나 가르쳐줄 물리적 시간이 잘 나지를 않습니다. 스스로가 똑똑한 사람들하고 효율적으로 일하는걸 좋아하는 분들은 정출연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 대학 교수의 최대 장점은 자율성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나간다는 그 심리적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스스로 개척해나가야하기 때문에 워라밸은 박살이 납니다. 스트레스와 일이 너무 많아서 건강을 해치는 교수님들도 종종 봅니다.


- 과제는 연구재단 것으로 수주하시면 하고 싶은 연구를 하실 수 있습니다. 논문만 쓰면 되구요. 그런데 대학원생을 원활하게 확보하시지 못하면 연구 수행 자체가 어렵습니다. 파키스탄, 구소련 국가(우즈벡, 카자흐스탄 등)의 외국인 학생을 받아서 연구하실 생각이 있으시면 그래도 과제 운영은 어느 정도 될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 중국, 인도, 베트남 등의 우수한 학생들은 더 이상 한국으로 오지 않거나 국내에서도 아주 상위권으로만 가는 것 같습니다.


- 이공계열 교수의 수입은 교수하기 나름이라 뭐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돈이 중요하면 애초에 아카데미아로 오지 않는게 좋다고 봅니다. 산학과제 등 열심히 뛰시면 (그만큼 건강을 해치시면) 수입은 올라갑니다.


- 직원들이 꽤 친절합니다. 저는 정출연에서 행정직 선생님들을 대하다가 교직원 선생님들 대하니 너무 기분 좋고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 명예 있습니다. 학생들도 존경?까지는 모르겠지만 잘 따릅니다. 다만 명예 얻자고 하는 직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학교는 교육을 하는 곳이고 교육을 잘 해야 명예도 의미가 있겠죠.



정출연에서 대학으로 넘어온 사람이라 아무래도 정출연의 현실에 냉소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대학의 현실 역시 냉소적으로 보려고 노력했으니 밸런스는 잘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장점들이 훨씬 많고 둘다 좋은 직장입니다. 다만 현실에서 고통받는 일들은 다 단점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런 내용들 위주로 적어보았습니다. 비슷한 고민 하시는 분들, 이 글이 선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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