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버텨보시죠.
학부 연구생부터 시작하여 한국에서의 석사과정, 미국에서의 박사과정, 미국 회사에서의 인턴, 미국 대학에서의 포닥, 국내 연구소 연구원, 대학교수까지. (제 지난 연재 시리즈 : 포닥 자리찾기, 포닥 탈출기)
제 필명이 "가방끈수공업자"입니다. 참 오랫동안 새끼줄 꼬듯이 가방끈을 길고도 길게 꼬아왔습니다. 포닥을 시작하기도 전에 썼던 글인 어느 가방끈 수공업자의 이야기에서 이야기한 저의 오랜 꿈, "석사를 마치고는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딴 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를 이젠 이뤘네요. 2008년인가 2009년에 꾸기 시작한 꿈이니 오래도 되었습니다.
이 순간에도 많은 대학원생들이 "공부를 그만둬야하나?", "난 연구에 재능이 없는건가?"하면서 많은 고민들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수없이 그런 고민을 해왔기 때문에 짐작이 아닌 확신을 해봅니다. 그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만 더 마음을 잡아보시라고.
제 이야기를 몇 개 해드리려고 합니다. 절망에 빠져있을 때 가장 힘이 되는 이야기는 힘내라는 위로보다는 같은 고통을 겪었던 사람의 극복담이겠죠.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재미가 있어서 이 길을 걷기 시작했기에 수많은 좌절을 겪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어떤 근사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겁이 많고 용기가 없고 결단력이 없어서 그냥 되는대로 버텼기 때문입니다. 근데.. 그게 되더라고요. 아래의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는 "버텨라"입니다. 좀 자세히 풀어보죠.
교훈 1. 안되는 건 가능한 빨리 포기하라. 우겨서라도.
학부 연구생으로 우수한 학회의 논문 두 편에 2, 3저자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느낌이 좋았고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석사과정을 시작하고 저만의 주제를 가지고 제 연구를 시작하고 나니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교수님께서 주신 주제에 대해서 거의 6개월간 아무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자신감이 떨어지고 교수님을 피해 도망다녔지요.
결국 6개월이 그렇게 흘러갔고 실패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가장 큰 패착은 실패를 인정하는데 6개월이나 걸렸다는 것 입니다. 능력의 한계를 느꼈다면 서둘러 교수님을 설득해서 포기하세요. 저는 이 연구를 왜 지속할 수 없을지 이론적으로 설명을 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이제와서 드는 생각은, 그때 그냥 능력 부족을 인정하고 교수님께 호소하여 일찍 중단했으면 어떨까?입니다. 교수님의 입장에서도 안되는 것 질질 끌다가 포기하는 것 보다는 빨리 선언해주는게 시간을 아낄 수 있습니다. 다만 연구하는 주제마다 포기를 한다면 그건 좀 난감하겠죠?
이 첫번째 좌절은 해피엔딩으로 끝났습니다. 연구주제는 포기했지만 연구자체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더 좋은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성공적으로 석사를 마치고 박사 유학을 떠나게 되었지요.
교훈 2. 부족한건 영어다? 지식이다.
이공계 기준 우리가 따라가야하고 앞서야할 연구는 대부분 영어로 된 논문이나 자료로 공개됩니다. 석사과정을 시작했을 때 많은 국제학회, 학술지 논문을 읽게 되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단어 단어의 의미는 알겠는데 한 단락을 읽어도 이게 무슨 의미일지 와닿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하나 번역해가며 읽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한 단락이 번역이 되었는데... 문제는 완벽한 한국어로 쓰인 문단인데도 불구하고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네. 제 배경지식이 너무 부족했던 것이죠. 지금이야 쓱 흝어봐도 이해가 가지만 그때는 정말 막막했습니다.
영어도, 배경지식도 단 시간에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읽고 계시는 논문을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지 않는다고, 좋은 자료들을 찾아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공부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논문들을 귀신같이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그런데 그 순간이 박사를 마칠 때쯤에야 오더라구요. 그러니 3-4년 해서 안된다고 포기하지마세요. 5-6년이 지나서 찾아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굉장히 뛰어난 천재가 아니라면요. 그리고 천재가 아닌 저 같은 보통 사람도 끈기를 갖고 다가선다면 충분히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게 연구라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훈 3. 천재들은 그냥 그렇게 지나칩시다.
바로 앞에 천재 이야기가 나와서 이어갑니다. 대학원 생활을 하다보면 주변에 정말 "천재"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한둘은 있게 마련입니다. 내 옆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일수도, 지구 반대편 어느 명문대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스타 박사과정 학생일수도 있습니다. 아직 졸업도 안했는데 좋은 학회와 저널에 논문을 쑥쑥 출판하고... 그런 분들을 바라보다가 스스로를 돌아보면 난 보잘 것 없는 연구만 하고 있는, 그 천재들의 발 끝도 못따라가는 사람인건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그냥 인정하고 지나가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천재들을 질투하고 열등감을 느끼는데 익숙해지다보면 어느 순간 그들의 단점을 찾고 비난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행위에서 혼자만의 우월감을 느끼는 방어기제를 만드는 것이지요. 다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ㅎㅎ 여러분들은 그러지 마세요.
제가 열등감에서 극복하게된 계기는 정말 똑똑하면서도 부지런한 연구자들을 만나면서입니다. 우리가 흔히 천재들은 게으르단 얘길 많이 하는데 그런 전형에서 벗어난 부지런한 천재들을 많이 만나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느꼈죠. 아, 이들은 내가 애초에 비벼볼 상대가 아니구나! 그 뒤로 그런 천재들을 만날 때마다 "Let them go"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냥 지나치세요. 그리고 여러분은 "엉덩이 힘"으로, 느리지만 자기만의 페이스로 성과를 만들어내면 됩니다.(이현세 만화가님의 "천재와 싸워 이기는 방법"이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교훈 4. 내 연구는 생각보다 의미있다.
연구를 깊게 파고 들어가다보면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래 다 좋은데, 이 연구가 현실 세계에서 의미 있는 것일까? 아무도 관심없는 것 같고 어디서 가져다 쓰지도 못하는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듭니다. 이런 걱정이 좀 더 발전되면 취업을 하려고 할때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갖지 않을 것 같고 나는 결국 길바닥에 나앉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까지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우리 옆집에 있는 분들에게 내 연구가 아무 도움이 안될지도 몰라도, 여러분이 하고 있는 연구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지식의 범위를 정말 손가락 한마디라도 넓히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기에는 정말 미미하더라도 언젠가 주목을 받을 수도 있구요. 내 연구가 의미있을까? 하는 걱정은 논문의 리뷰어, 학회나 저널의 에디터에게로 미뤄두시길 추천합니다. 내 연구의 중요성은 그들이 판단해줄거고, 그 과정을 통과한 연구들은 다 의미 있음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하세요. ("The Illustrated Guide To A Ph.D." 이 글이 제 마인드셋을 바꾸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교훈 5. 지도교수님은 생각보다 괜찮은 리뷰어다.
지도교수님은 항상 이 내 아이디어에 맨날 반대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수님이 갖고 계신 높은 기준, 그 문턱을 넘지 못해 힘들었던 기억이 많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이 제출을 허락한 논문은 거의 대부분 통과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고 교수님은 제게 넘어야 할 산이라기 보단 아주 냉철하고 똑똑한 리뷰어가 되었습니다. 매주 반복되던 연구미팅의 목표는 이 분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누구도 설득할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지금에야 굉장히 유명해진 글이죠. 권창현 교수님의 "박사과정 학생이 유의해야 하는 점"을 박사과정 초반에 읽었던 것은 굉장한 행운이었습니다. 매주 지도교수님과의 개인 연구미팅에서 교수님을 리마인드 시켜드리는 일부터 시작해서 논의가 꼬이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했고 상당한 효과를 거뒀습니다. 이젠 학생들을 지도하는 입장에서 지난 주에 했던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지만, 학생들에게도 알려줍니다. 제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니 기억을 못하는 내용이 있을 수도 있고 지난 논의와 반대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그럴 때마다 저를 멈추고 바로 잡아달라고 부탁합니다. 학생의 입장에서도 항상 노력해야하는 부분입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도교수와 대결하지 말라는 것 입니다. 암만 연구의 디테일에 크게 관심을 쏟지 않으시는 교수님이라고 해도 그 분만큼 이 연구를 잘 아는 사람은 전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교수님을 잘 활용하려고 노력해보세요. 물론 지도교수를 설득하는 일은 아주 지리하고 어려운 일 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버텨낸 사람들이 지금도 좋은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있습니다.
교훈 6. 버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스무살 무렵 한 선배가 이런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사실 누군지 기억도 잘 안납니다). 제게 직접 한 이야기도 아닌데 정말 와 닿았고 아직도 제 삶의 모토 중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대략 "웃으며 지내길 바라진 않는다, 다만 지치지 않기를"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웃으며 환호할 일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연구자의 인생에서는 일년에 몇 번 없습니다. 제 분야는 일년에 논문 두어편 내기도 쉽지 않아서 그 환호라는 것은 정말 드물게 찾아옵니다. 그래서 환호하는 순간의 에너지로 일년을 지내기엔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저 지치지 않고 일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여러가지 불안감이 여러분을 휩싸고 있을 것 입니다. 논문, 졸업, 취직 등등. 그런데 지나고 보니 특출나게 잘할 필요 없더라구요. (물론 그러면 좋긴 하겠지만요..^^)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힘든 이중고 속에서 지치지 않고 버티는 것 자체가 특출난 일입니다. 동틀 무렵이 가장 어둡다죠? 힘들어서 주저 앉고 싶을 때, 조금만 더 가면 우리가 찾던 오아시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 더 가기 전엔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눈 딱 감고 조금만 더 버텨보자는 마음으로 몇 번만 다시 일어서 보시길 권합니다. (다만 우울증 등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황이 찾아왔다면 주저없이 의사를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우울증은 의지가 약해서 생기는게 아니라 호르몬의 문제이고 감기에 약 먹듯 약으로 생각보다 간단하게 해결되는 병 입니다.)
애쓰지 마라, 마음가는 대로 순순하게 살아라, 라는 메시지를 주는 임태주 시인의 작품 "어머니의 편지"가 마음을 다잡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다음 구절이 주는 감동을 여러분도 같이 느끼시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