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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방끈수공업자 Jul 25. 2016

어느 가방끈 수공업자의 이야기

초중고학석박포닥--네버엔딩 수공업

석사를 마치고는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딴 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매우 진지한 마음이었지만 저 짧은 문장에 들어있는 수많은 굴곡을 알지 못했다.


1. "석사를 마치고는"

국내 석사라 한들 시간만 때우고 있으면 나오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나는 다행히 합리적이고 진정 "스승"의 마인드를 가진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서 소위 "사노비 대학원생"과 같은 학위과정은 겪지 않았다. 하물며 우리 랩엔 고년차 박사꼰대선배들도 없었다. 하지만 기본만 하는 것도 결코 쉬운게 아니었다. 학위 연구도 진행해야하고 내 인건비와 학비를 내주는 과제를 위해서 일도 해야한다. 여기에 나는 유학을 계획했기에 토플과 GRE 공부까지 했어야했다. 그나마 수업부담이 없는 방학마다 토플, GRE 강의를 들었다. 새벽 네시반 기상 후 강남 해커스 토플가서 새벽 수업 듣고는 아침에 연구실 출근하고 밤에 퇴근하여 수업 예습/복습을 하고는 새벽 1시쯤 잠드는 생활을 석달씩 하다보면 삶이 참 피폐해졌었다. 지하철은 토막잠을 자거나 단어를 외우는 시간이었다. 앉을 자리를 필사적으로 찾아야했다. 졸업 시기와 대형 프로젝트 마무리 시기, 유학 원서 제출시기가 겹치는 바람에 일주일의 절반 이상은 연구실 책상 밑에 전기담요 깔고 자곤했었다분홍담요를 덮고 핑크빛 꿈을.


그래도 어떻게 잘 했다. 교수님의 특별 배려로 한 달은 인건비를 안 받는 대신 GRE 공부만 할 수 있었다. 이 배려가 아니었으면 아마 나는 유학에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2. "해외에서"

"해외에서 박사학위를"까지 끊는게 아니라 "해외에서"에서 이미 한번 끊어야한다. 나는 미국에서 5년째 살고 있다. 다행히 한국학생들이 많은 곳이라 외로움을 겪진 않았지만 태어나서 28년만에 처음 남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여행과는 많이 달랐다. 지금이야 많이 익숙해졌지만 영어부터 시작해서 서로다른 문화에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에서 생활하시는 외국인 학생, 노동자 분들 정말 고생하며 사시는거다. 나는 그걸 굉장히 늦게 깨달았다. 대신 뼈저리게 느꼈다.


3. "박사학위를 딴"

"딴 후"의 이야기는 아래 또 쓸 것이다. 사실 이건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딴"까지 붙여야 더 극악한 난이도가 완성된다. 영어를 어버버하던 외국인 박사 신입생은 지도교수님과의 첫 미팅에서 멘탈의 사라짐을 경험했으며 영어의 문제는 해결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여전히 영어 원어민 수준은 못된다. 석사학위 시절과는 다른 내 주도의 연구를 하는 것도 적응이 필요했으며 "지도" 보다는 "질문"을 많이 하는 지도교수님의 스타일에 맞추는 것에도 시간이 걸렸다. 박사학위 자격시험(퀄 시험)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했으며 연구과정에서 많은 고난과 시련을 맞이했다학위와 머리숱을 바꿨다. 요즘 박사과정 공부에 대한 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나까지 보탤 필요는 없는 것 같다.


4. "후"

요즘 겪고 있는 난관이다. 작년 여름 유명한 미국 기업에서 연구인턴을 했다. 그런데 이 경험이 득이 된 것이 분명 있지만 한편으론 실도 있었다. 나의 방향성을 흔들어놨다. 돈버는 재미, 뭔가 쿨한 것을 한다는 느낌이 좋아서 회사를 기웃거리게 된 것이다. 나의 지난 박사과정 5년은 학계를 겨냥한 것이었기에 인더스트리에 도전하기엔 자격이 미달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쿨한" 일을 하고 싶다는 욕심에 (그리고 이제 그만 카드빚 갚고 돈버는 미국생활 해보고 싶다는 욕심에) 여러 회사에 지원서를 제출하고 인터뷰하고 기다리는데 시간 및 에너지 소비가 심했다. 그러는 와중에, 나의 그 동안 연구내용 및 기술은 회사와 맞지 않다는 결론을 뒤늦게 냈고 허겁지겁 박사후 연구원(포닥) 자리를 알아보게 되었다. 두어달에 걸쳐 30곳에 가까운 연구실에 연락을 하고 그 중에 몇 군데에서만 자리가 있다는 답을 받고 인터뷰를 하고 뒤늦게 다행히도 좋은 학교, 연구실에서 자리를 잡을 기회들이 생겨났다. 이제야 겨우 그 "림보"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굉장히 자존감도 떨어지고 암울한 시기였다. 내 길이 아닌가보다 싶어서 한국 기업과 면접을 진행해서 거의 한국에 들어갈 뻔도 했다. 그 기업 연구소들도 매력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 곳이기에 마음이 많이 기울었으나 포닥 오퍼들을 받음으로 인해 다시 처음 마음먹은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5. "한국으로 돌아와서"

이건 자의와 타의의 문제가 모두 걸려있을 것이다. 자의라고 하면, 미국의 좋은 노동환경과 (물론 Work-life balance의 시각에서. Layoff 면에서 바라보면 이건 한국이 더 좋을 것이다) 여유로움을 두고 과연 내가 한국에 갈 용기가 있을지이다. 타의라고 하면 미국에서 살길 원하지만 결국 나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쩔수 없이 한국에 돌아가는 경우이다. 나는 지금 미국생활에 대한 큰 미련은 없기 때문에 (빨리 한국가고 싶다 맛있는거 먹고 친구들하고 놀고 싶어서) 사실 한국에 돌아가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갈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래서 아래 6번에 적혀있듯이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6. "학생들을 가르치고"

아. 이건 생각만해도 막막하다헬게이트오픈. 해외 박사 입학허가를 받는 것, 포닥자리를 찾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다. 혹자는 교수직을 잡는 것을 주차장에서 주차하는 것에 비유한다. 물론 그 주차장은 굉장히 엄격한 기준으로 최상위의 사람만 주차를 허가할 것이다. 그리고 주차장은 이미 만석이다. 내가 차를 제때 대려면 내가 지나가는 때에 마침 근처에서 차가 나가야 할 것이다. 내가 그 차를 스쳐 지나간 후엔 이미 뒤에 줄지어 들어오고 있는 다른 차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러한 타이밍의 문제 외에도 아주 많은 것들이 얽혀 있을 것이다. 이건 내가 이 항목을 경험해 본 후에 (되도록 성공한 후에) 다시 추가해서 작성하고 싶다.


이렇게 나의 초중고학석박포닥 가방끈 늘리기는 현재 진행 중이다프로페셔널수공업자.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비슷한 길을 가고자 하는 분들... 기왕이면 "학"이나 "석"에서 끊으시는 것이 정신건강에 유익하실 수 있다. 불확실성을 즐기는 변태성향이 있으시지 않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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