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소피 프리즘 - 철학으로 세상을 보다
카페는 어느새 우리 일상 속에 아주 깊숙이 자리 잡았다. 현대인들이 카페를 사랑하는 이유는 카페가 단순히 음료나 음식을 위한 공간을 훨씬 넘어서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로 유럽에서 카페가 번창하기 시작할 때부터 카페는 이미 다목적 공간이었다. 신문이 유통되고, 소문이 전달되고, 정치·경제적 토론이 이뤄지는 등 정보 교류의 주요 장으로 기능했다. 또한 물건을 팔고, 공연이나 시 발표회가 열리는 등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카페는 인적 교류와 작업을 위한 공간의 성격이 강하다. 커피는 어떻게 보면 부수적 요소다.
현대의 카페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피난처로서의 카페다. 바깥 세계와 명확히 구별되는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매장들이다. 보통은 특유의 테마가 있다. 다양한 식물을 모아놨거나, 만화 캐릭터 콘셉트로 꾸며 놓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공간에서 우리는 효율성과 체계성의 원리에 따르던 기존의 패턴에서 벗어난다. 기계적 삶을 강요하는 경제적 현실을 탈출해 원초적인 환상의 세계로 이동한다. 삭막한 도시 생활에서 상실된 자연의 품속으로 돌아가기도 하며,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세계로 다시 진입하기도 한다.
두 번째 종류는 공장으로서의 카페다. 이런 카페는 보통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며, 복잡한 장식적 요소 없이 깔끔하고 심플하다. 이런 공간은 우리의 경제적 기능을 촉진한다. 학생이 공부에 더 열중하도록, 회사원이 문서 작업에 지치지 않도록, 사업가가 미팅을 매끄럽게 하도록 쾌적한 환경을 제공한다. 물건만 안 만들 뿐이지 이런 카페는 경제적 생산의 장이다. 심지어 카페에서 이뤄지는 휴식과 인간적 대화마저도 생산 공정의 한 축을 이루는 측면이 있다. 휴식과 대화를 통해 우리는 정서적 만족을 얻는다. 그렇게 ‘안정화’된 우리는 점심시간이 끝나거나 다음날이 밝으면 다시 일터로 나간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현대사회에서 “꿈세계(Traumwelt)의 잔여물”이 발견되는 공간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백화점이나 박람회장이 대표적이다. 이런 공간에서는 상업과 예술이 혼재돼 있다. 현대는 기계적 대량생산에 기초한 폭발적인 부가가치 창출을 통해 출발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효율성이 최고의 원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높은 효율성에 기초한 막대한 부의 창출이 없다면 모든 현대적 소비활동이 지탱될 수 없다.
그런데 효율적 삶이 강제될수록 사람들은 억압된 무의식, 즉 꿈의 세계를 어딘가에서 되찾으려고 한다. 불규칙성과 원초적 무절제함이 분출되는 지점을 욕망하게 되는 것이다. 벤야민은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아르누보 양식에 주목했다. 아르누보는 공예, 포스터, 건축 등 디자인 분야에서 일어났던 운동으로, 꽃장식이나 넝쿨 모양 등 자연을 형상화한 모양이 특징이다. 벤야민은 산업화 이후 차갑고 효율적인 철골구조로 도시가 채워지고 계산적인 업무가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은 잃어버린 자연의 원초성을 디자인 속에서 찾게 됐다고 주장했다.
카페는 태생적으로 꿈세계의 잔여물이다. 머나먼 열대지방의 커피콩으로 만든 음료를 비싼 돈을 주고 사 마시면서 사람들은 이국적인 세계와 연결되는 느낌을 받고 사치에 대한 원초적 욕망을 작게나마 실현한다. 현대에 들어서는 독특한 테마로 무장한 피난처 유형의 카페들이 많이 생기면서, 돈을 주고 손쉽게 환상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됐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카페에서의 금전적 소비가 꿈세계로 향하는 보편적 방법으로 자리 잡으면서,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하게 됐다는 것이다. 꿈세계에 진입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는 다시 카페라는 휴식 공간 혹은 작업 공간이 필요하다. 카페의 이러한 이중적 면모, 즉 일과 휴식이 공존하는 면모는 노동과 여가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대사회의 흐름과 아이러니하게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