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충녕 Jan 04. 2024

코인노래방

자유의 발악

 언제부턴가 도시에 곳곳에 코인노래방이 생겼다. 처음 생길 때는 천 원 넣으면 네다섯 곡 부를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천 원에 두 곡인 데가 많다. 코인노래방의 유행은 일인가구의 증가세와 궤를 같이한다. 내가 어렸을 때는 대여섯 명이 모여서 노래방에 가는 경우가 많았다. 노래방은 학생 무리, 직장 동료들, 가족 등 다양한 공동체가 모이는 장소였다. 그 당시 노래방에 간다는 건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러 간다는 거였다.

 코인노래방은 다르다. 혼자 가는 게 기본이다. 혹은 많아 봐야 2~4명 정도가 함께 간다. 젊은 커플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인기가 많다. 코인노래방은 일반 노래방보다 훨씬 비좁고, 음향 장비도 형편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별 상관은 없다. 그냥 혼자 또는 소수 인원이 가볍게 몇 곡 부르고 기분 좋아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코인노래방이 인기가 많은 이유는 이 도시 안에서 그나마 개인의 자유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좁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평상시 길을 걸어가면서 노래를 부르면 미친 사람 취급받겠지만, 코인노래방 안에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상관이 없다. 여기는 평가자가 없다. 항상 남들의 기준에 의해 평가를 받아야 하는 학교나 직장과 다르다. 그저 내 식대로, 실수에 대한 염려 없이 노래를 부르면 된다. 기계가 노래에 점수를 매기긴 하지만, 알 바는 아니다. 기계가 나를 혼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코인노래방은 잠시나마 나의 작은 왕국이 된다.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 중 한 명인 칸트는 예술과 인간의 자유 사이에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다고 봤다. 예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예술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예술가에게는 돈벌이 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술은 기본적으로 잉여적인 활동이다.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니라 남는 시간에 즐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감상할 때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정신이 자율적으로 놀도록 놔둔다. 음악에 나를 내맡기거나, 그림에 깊이 빠져드는 등 일상의 통제를 벗어나는 영역까지 정신의 활동 범위가 넓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인간이 예술을 경험할 때 본능, 욕망, 그리고 사회에 의해 학습된 생각의 틀로부터 잠시나마 자유로워지는 체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코인노래방은 이 도시 안에서 거의 유일하게 칸트가 말한 예술적 자유가 실현 가능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도시들은 너무나 산업 중심적으로 건설돼서, 모든 곳이 생산성 향상이라는 목적에 봉사하도록 디자인됐다. 공간은 생산성의 하인에 불과하다. 생산성의 명령 하에, 집은 좁게 지어지고, 일터와 편의시설은 밀집되고, 자연은 최소화됐다. 이런 공간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이 함께 평화로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강력한 규율이 필요하다. 생산성의 헌법이 있는 것이다. 담배를 필 공간, 소리 지를 공간, 마음껏 뛰다니며 춤출 공간,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새겨넣을 공간은 모두 공공의 규율에 의해 극히 제한된다. 심지어 활동이 제한되는 것에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 익숙해진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활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행동의 싹 자체가 평균에 맞게 잘려나간다.

 코인노래방은 이렇게 인간의 행동이 사회의 목적에 맞게 재단되는 와중에, 그나마 저렴한 가격에 사소하게나마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물론 이곳도 CCTV가 감시 중이고 지켜야 할 규칙이 있지만, 그래도 노래라는 예술적 활동에 남 눈치 안 보고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자유마저 판매의 대상이 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단돈 천 원에 작은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이점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코인노래방을 그토록 사랑하는 것이다. 치솟는 집값 때문에 사적인 거주공간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할 기회마저 빼앗긴 청년들이, 반 평짜리 어두운 방 안에서라도 맘껏 소리치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는 이 소리침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지금도 홀로 비좁은 칸 안에서 노래하고 있는 학생들과 청년들의 외침은 단순히 노래 연습의 소리가 아니다. 거세된 행동력의 한계 안에서 그나마 시도해 보는 자유를 향한 갈망의 외침이다.

작가의 이전글 아파트와 수직적 사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